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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어떤 약을 주었는가?

예전과 달라진 여러가지 일들

by 전희태
IMG_6769(2245)1.jpg 흐르는 시냇가에도 숨겨진 나리꽃 같은 세월의 약은 있겠지.


1960~70년대만 해도 다른 배들과 외국항에서 나란히 부두에 접안하는 경우를 만나게 되면, 비록 같은 회사의 배가 아니라 하여도, 국적선이든, 외국적선이든 한국 선원이 타고 있는 줄만 알면 무조건 올라가서 적극적으로 그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반가워하는 심성들을 당시의 선원들은 모두가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정겨웠던 관습이 우리나라의 해운이 커지기 시작하는 90년도 후반부터 요사이에 이르러서는 타사선은 커녕 자사선 끼리라도 별로 내왕하며 반갑게 대하는 풍토가 줄어든 것 같다. 어쩌다가 만나도 띵하니 무표정하게 겨우 말 몇 마디 하는 정도이고, 자신의 일로 관심을 돌려버리는 그런 무덤덤한 아니 싸늘한 적의(?)조차 느껴지는 세태로 변화되는 걸 보면서, 처음 만나도 정이 마냥 흐르며 좋았던 예전의 분위기가 그리워지는 마음이 아스라하니 스며 나온다.

-한국배 들리면 나오세요!


VHF 전화 소리로 그렇게 불러오는 목소리를 심심찮게 들으며 항해하던 그런 시절도 있었건만, 요새는 우리들한테 그런 말을 배운 동승하는 필리핀 선원들의 흉내 내는 말로서도 듣기가 어렵게 되었다.


왜 그렇게 빡빡하고 사무적인, 무시하는 태도가 주류를 이루는 풍토로 변해가는 걸까?

너무 자신과 상대를 비교하는 마음이 늘고, 시샘하는 마음이 커지니까 그런 것 같지만. 어쩌면 보기와는 반대인 진취적이지 못한 요사이 선원들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크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 회사는 이렇게 해주는데 너희 회사는 저렇게 해준다면서? 하는 식의 현재의 입지를 서로 비교하며 생겨지는 차이로 인한 시샘하는 마음, 그에 따른 무시 하고 싶은 마음 등.


결국 선원이란 동류의식 보다는 개별적인 현재의 위치가 더욱 부각되고 비교되어 마음의 갈등을 증폭하는 사고방식의 두드러짐이 그렇게 서먹서먹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그런 만남의 자리에서 별로 필요치 않은 비교만을 나눔으로 인해 쓸데없는 갈등이나 낳게 하고 그걸 또 크게 부풀려 마음에 앙금으로 남기니, 서로를 정으로 묶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스스로 내쳐버리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이겠지.


지금 뒤에 접안해 있는 현대 상선의 현대 프로스페리티호가 아침에 와서 접안했는데 그 배에서나 우리 배에서나 반나절이 지난 아직까지 왕래가 없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까? 점심시간에 보니 3항, 기사의 식탁이 비어 있다. 상륙 나갔는가? 물으며, 아직은 당직 등 모든 것을 배워야 하는 초급 사관인데, 벌써 외출하는 일부터 배우는 거야? 하는 나 혼자 언짢게 생각했던 짐작과는 달리 그들은 현대상선의 배로 일도 할 겸 놀러 갔던 모양이다.

잠시 후 양팔로 박스 하나씩을 힘겹게 안고 들어오는 그들을 보니 비디오테이프를 바꾸러 그 배에 갔다 오는 길이란 걸 알겠다. 선내 오락 프로그램 중 하나인 비디오 시청을 위한 테이프를 서로 교환하여 보기 위해 그 배로 우리 배에서는 다 본 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역시 그 배가 다 본 프로그램과 서로 바꿔 가지고 온 것이다.

오후 들어서며, 그 배에서 삼, 항기사가 실습생 두 명과 함께 우리 배로 놀러 왔다. 나한테 인사드린다며 방문을 두드린다. 우선 반갑게 맞이 해주며 시원한 마실 것을 내주도록 조리수에게 지시했다. 그들은 그 배의 실습생들도 같이 데려 왔는데 그 애들은 해양 경찰학과 학생이며 52기라고 소개를 하니 나에게는 35년이나 후배가 되는 친구들이다.


예전 우리가 배를 처음 타던 시기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요지음의 세태를 꼬집어 생각했던 내 관찰이, 오늘만큼은 이 아이들이 왔다 갔다 하는 왕래로 인해, 내 생각을 괜한 지레짐작으로 섭섭한 세태라고 매도하는 내 잘못으로 만들어 준 셈이다. 그렇게 내 생각의 일부가 틀려진 것은 오히려 좋은 현상으로 받아들이지만,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는, 그렇게 이야기한 내 생각이 전적으로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믿음이 그대로 뭉기적거리며 남아 있다.


35년의 세월이란 게, 산천이 변하기를 세 번하고도 반이나 더 할 수 있는 그런 세월이 아닌가? 그러니 변한 건 틀림없이 있는 것이고, 종종 실감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곁눈 한번 주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며 바람과 투쟁의 껄떡거림 속이지만 그래도 끼리에의 의리는 심어보며 살아온 오늘날 나와 같은 세대를 엑스세대로 구분되는 이들 젊은 후배들은 과연 어떻게 관찰해주고 있을까?

아직도 -세월이 약이겠지요-. 하는 노래를 따라, 세월이 남겨준 약을 찾아보려는 내 마음은 점점 더 바빠지기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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