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인 앵카 체인

큰 사고 낼뻔했던 닻과 닻줄

by 전희태


090803-DALRYMPLE_BAY_0191.jpg 도선사를 승선 시키려 날라 온 헬리콥터



오랜 정박으로 기다리던 일을 끝내고, 아침에 도선사가 승선한다는 지점까지 14마일이라는 거리를 감안하여 거기까지 가는 시간을 예상하여 도선사 승선 예정 두 시간 반 전에 <선수 부서 스탠바이>를 시킨다.


일항사를 비롯하여 선원들이 선수로 나가는 걸 확인하면서 준비되는 대로 앵카를 감아 들이도록 지시한다


<나인 샤클 온 덱, 체인 리딩 일레븐 어클락크, 베리 스트롱> 필리핀인 일항사의 보고가 짧고 명료하게 들려온다.

아홉 절째 닻줄이 갑판 위로 올라왔고 닻줄 방향은 열 한시로 장력이 매우 강함. 이란 뜻이다.


다음 한절이 더 올라올 때까지 몇 분이 걸리는가를 시간을 체크한다. 약 3분이 걸린다.

그 정도면 윈드라스의 형편이 평균이 되는 정상 상태이다. 만족한 마음으로 닻이 다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투 샤클 온 덱 체인 업엔 다운 써>라는 보고가 올라온다. 이제 닻줄이 해저에서 닻을 마지막으로 일으켜 세우는 과정인 ANCHOR AWEIGHT (닻 떠) 상태에 다가서고 있는 셈이다.


시간이 흘러 이미 닻이 뜨고 물 위에 올라왔을 때가 지나갔을터인데도 선수루에서는 보고가 없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할 수가 없는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게 틀림없어 보여 우선 3 항사를 앞으로 내려 보내 현황 파악을 해서 보고하도록 조치한다.


  잠시 후 현장에서 메신저 보이로 올라온 갑판원이 손짓까지 써가며 설명하는 걸 들어 보니 앵카 몸체에 체인이 감겨서 닻이 수평으로 누운 채로 올라온 모양이다.


 이윽고 현장으로 급히 나간 삼항사의 보고로 앵카 체인이 앵카의 크라운을 한 바퀴 감아서 수평으로 올라온 상황이라 천천히 내려줘서 감겨 있는 체인이 절로 풀어지게 만든 후 다시 올려야겠다는 보고를 해온다.


 탯줄을 목에 감고 어머니 몸을 빠져나오려는 아이들도 간혹 있다던데 마치 그런 상황에 맞닥뜨린 초산의 숨 막히는 시간에 선 애기 아빠나 된 듯한 긴박해진 심정이 참 고달프다.


그래 좀 일찍 닻을 감아 충분한 시간을 가지려고 했던 게 이런 일을 만나려고 그랬던 건가? 하는 심정까지 들어선다. 차분하게 대처하자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현상황을 차분히 물어본다.


그냥 렛 고 앵카 하는 식으로 내려주면 혹시 체인의 절단이 우려되는 상황은 아닌지를 물은 후, 한 샤클을 역으로 풀어 내주어 해저에 뉘었다가 감아 들이도록 지시한다.


조심스레 윈드라스를 사용하여 내려주던 상황에서 이쯤에서는 렛 고 해도 괜찮겠다고 여겼는지 촤르르 하며 체인을 쏟아내는 소리가 잠깐 들려오다가 멈춘다.


잠시 후 다시 앵카 체인을 감아 들이기 시작한다는 보고가 조심스레 올라온다.


그래 목에 감고 있는 탯줄을 풀어내야 사는 것이니 너도 마찬가지로 크라운에 감긴 체인을 풀어내고 올라오너라! 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일각이 여 삼추>로 기다리는데,


-체인이 풀려서 앵카가 제대로 올라옵니다.

하는 삼항사의 기쁜 목소리가 울려온다.


-그래 알았어. 잘 감아 들이어 수납하라고 하고, 너는 올라오너라.

잠깐 동안 갖고 있던 걱정을 훌훌 털어내며 3 항사에게 대답하는 응답이 아주 경쾌하다.

-<스로우 어헤드 엔진.> 편해진 마음으로 엔진 사용을 위한 발령을 내준다.

약간의 진동을 느끼게 하며 엔진이 걸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온몸을 싸고 든다.

-<하드 스타보드.>

이번에는 배를 오른쪽 최대 각도로 전타 하라는 조타 명령을 내려 이제 우리가 들어가야 할 항구를 향해 선수를 돌려주기 시작한다.


파이로트는 0730시에 헬리콥터로 오기로 약속이 되어있다. 배는 그곳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어느새 가까이 찾아온 여명이 반가운 인사라도 하듯 어둠을 몰아내고 있다.


대기 묘박지에 정렬하듯 줄을 이어 쭈욱 투묘하고 있는 배들의 모습을 보며 관함식의 주역으로 나선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한다. 아니 열병식을 하는 최고 지휘관이라도 된 것 같은 뽐냄까지 은연중 가지게 됨은 이 새벽 잘 풀린 일들이 있어서인 모양이다.


몇 달 전 방글라데시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가졌었는데 그때의 나를 맞이해 주던 배들은 이미 배로서의 기능을 멈추고 있는 부상병 같은 모습의 폐선들이 모인 것이었지만, 여기는 아직 팔팔하게 일을 하는 배들의 모습이 아닌가?


 그 배들의 사진을 하나씩 열심히 찍어두기 시작한다. 나중 <VESSEL TRACKER. COM>에 올려줄 배 사진으로 써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하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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