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가운데 가족의 묘를 쓰고 있는 베트남의 풍습>을 사진 찍으며 내 마음의 한 켠에다 친구의 모든 걸 보관해보리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우리들의 40년 지기 오랜 친구 K, K M이 2009년 9월 14일 14시 40분 일산 암센터에서 임종하였습니다. 고통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시게! >>
짤막한 이 말이 또 다른 오랜 친우인 K로부터 이멜로 전해오면서 그래 우리들의 친구 중 한 사람이 영원히 우리들 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여엉 믿고 싶질 않다.
루O라는 본명을 가진 가톨릭 신자로서 그 친구는 영생의 믿음을 가지고 떠났으니 그의 믿음대로 이루어지기를 나 또한 믿고 바라고 있을 뿐이다.
50 년 가까운 짧지 않은 세월을 친구로 지내오면서 그중에는 짧으나마 아주 짙은 희로애락이 깃든 시기까지도 같이 보냈던 친구.
이제는 영영 볼 수 없는 곳으로 갔구나.
우리 모두는 좀 먼저 조금 나중이란 시간 차를 두고 가야 할 길이기에, 제 먼저 앞서 간 것일 뿐이라고 자위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냥은 떨쳐 내기 힘든 앙금이 마음 한편에 남는다.
언젠가 남아 있든 우리도 떠나는 날 그곳 어디에 선가 다시 만나자는 기약이나 받아 둘 것이었는데… 아무런 이야기 없이 헤어졌던 지난번 모임에서의 그가 웃는 얼굴로 다가선다.
그 친구는 20대 후반에 집안에서 시킨 결혼이 싫어서 결국은 이혼을 하고 집을 뛰쳐나와 아니 집안과 연을 끊다시피 뛰쳐나온 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재혼하였다. 물론 그녀는 초혼이었다.
그러나 집안의 도움도 없는 부부의 사랑 밖에는 자랑하며 내놓을 게 없었던 그 친구의 신혼 기간을, 처음 내 힘으로 집을 샀던 신개발지의 주택인 우리 집 건넌방에서 계속하도록 도와준 후 나는 배를 타러 집을 떠났었다.
그런 기간이 어느새 일 년이 지나며 우리 집 건넌방 생활에서 아들까지 얻게 되었던 그 친구.
그때쯤 에는 그의 집안에서도 인정하게 되면서 그는 세상의 장삼이사에 편입되는 안정된 생활에 들게 되었고, 통조림 회사의 지방 공장 현장의 책임자로 나가면서 우리 집에서도 이사를 나가게 되었다.
그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 했던 그가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그 후 자영업으로 돌아서서 자그만 하지만 성공을 거두어 이제는 인생의 기쁨을 만끽하며 살아가게 되었다고 믿었는데 떠나가게 된 것이다.
최종적으로 진단받은 병명이 간암이었기에 그에게 남은 날들이 얼마 되지 않으리라는 짐작에 씁쓸해진 나의 속내를 보여주지 않으려 무진장 애쓰느라 별말도 못해주며 승선하러 집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K M 아! 우리 다시 만나는 날을 기약하며, 먼저 그곳에 자리 잡고 우리를 기다려주게 나.
얼굴 기득 빙그레 띄우는 선한 미소가 너무나 좋았던 친구의 건강한 시절 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