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지에는 당직 사관만이 있을 뿐 마침 초겨울의 북태평양 답지 않게 잔잔한 날씨를 보이는 해면 위를 제 소리를 일정하게 내는 기관의 살아있는 맥박만을 느낄 수 있는 아주 조용한 아침이다.
윙 브리지로 나서서 선수 쪽을 바라본다.
조용히 다가서는 해면이 선수와 부딪치며 작은 물결을 만드는 것은, 잘 보이지 않던 매끈하고 커다란 너울이 조용히 합류하며 뒤로 흘려주고 있어서이다.
그런 파도에 마음 편하게 실어가며 눈길을 따라 보내다 보니 어느새 내 몸은 서서히 돌려져서 선미 쪽을 향하고 있다.
프로펠러의 힘찬 회전이 빚어준 물보라와 함께 선미로 계속 밀려 나가고 있는 항적의 소용돌이 모습이 점점 매끈하게 변하며 멀어지더니 저 멀리 수평선 못 미쳐서는 희미한 흔적으로 잦아든다.
이 검푸른 바다 위에서 살아있다는 상황을 나타내는 그 모습을 연출하는 주체를 사람이 만들었지만, 이미 사람들의 품을 떠난 한결같은 주기관의 늠름한 운동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잠깐 품어본다.
눈길을 거두려는 선미 항적의 끝 쪽 수평선 위로 작은 점이 갑자기 나타난다. 빠른 속력으로 점점 커지고 있는 그 점의 모습을 보며 비행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깨닫는 데는 더 이상의 시간이 필요 없었다.
맞다 그건 비행기였다. 캐나다 코스트가드의 비행기임이 틀림없다.
비행기가 배의 항적을 따라 선미에서부터 선수 쪽으로 훑어내듯 가까이 접근한다는 것은 그 상대 선박에 대한 해상 감시의 행동을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일 뿐이다.
지금 저들은 우리 배가 그동안 TRAFFIC에 보고했던 모든 상황을 확인하면서 아울러 불법 쓰레기나 유류의 해상투기 같은 일을 단속하려고 저렇게 이른 아침부터 나선 모양이다.
우리 배는 조용히 항해만 하고 있고 그런 검문받을 일은 한 게 없으니 마음 편하기는 하다.
하지만 만약 오늘이 평일이라 갑판 청소라도 했다면 그게 이 해역에서 불법적인 일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혹시 룰이 달라져서 금지된 해역에라도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등의 걱정을 했을 것이다.
비행기는 그렇게 휭 하니 우리 배의 약간 좌현 쪽 하늘을 지나치더니 새벽부터 우리 배를 앞질러 이미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린 컨테이너 선이 달려간 곳을 향해 사라져 간다. 나온 김에 두 배를 모두 확인하고 돌아갈 모양이다.
사실 배가 근해를 빠져나와 이제 원양 항해에 들어설 무렵 갑자기 나타나 배위를 지나치는 비행기를 만난다는 것은 사실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닌 상황이다.
그것은 무언가 우리 배를 겨냥한 그들의 속셈이 있는 것을 나타내는 일이기에 그런 것일 게다.
함부로 빌지나 기름기를 유출한 것은 아닌지, 또는 불법 쓰레기를 투기한 것은 아닌지 등의 본선이 잘못한 일이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나타난 것으로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일 게다.
하여간 비행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제 갈 길로 가버려서 다시 만나지는 않았지만 예전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에 있었던 포크랜드 전쟁 시기에 겪은 일을 다시금 떠 올리게 한다.
그 무렵 유럽에서 석탄을 풀어주고 공선으로 다시 남아공의 리처드 베이에 석탄을 실으러 회항하던 항차가 있었다. 그렇게 가야 하는 항정의 길목에는 지나쳐 가야 하는 두 개의 작은 섬이 있었다.
남아메리카 동쪽이고 아프리카 서쪽인 남대서양의 중간쯤의 바다 위에 있는 아주 작은 섬들이다.
먼저 만나는 섬이 남위 7도 55분, 서경 14도 25분 위치한 아슌시온(ASCENSION ISLAND)이란 영국령 섬이고 좀 더 남하하며- 좀 더 라지만 몇 백마일 조이 떨어진 곳인-남위 15도 55분, 서경 5도 43분 위치에는 SAINT HELENA라는 섬이 있다. 역시 영국령이다.
이름을 보면서 아! 이 섬이 그 유명한 나폴레옹의 유배지였던 곳인가? 하는 역사를 생각해 보게 하는 바로 그 섬이다.
그 당시에도 절해의 고도(絶海 의 孤島)였지만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다를 바 없는 섬들이다.
아직은 어둠이 짙은 새벽녘에 아순시온 섬을 10여 마일 가까이로 지나치게 되었는데, 불빛도 보이지 않던 그 섬에서 갑자기 굉음을 내며 날아 오른 비행기가 우리 배의 상공을 겁나게 빠른 속력으로 지나치는 소리에 잠이 깨어 급하게 브리지로 올라갔던 기억이 있다.
순간적으로 짜릿한 공포심마저 일으키는 군용기의 강력한 접근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비행기는 그렇게 겁을 주고 사라진 후 또 나타나지는 않았다. 일단 정신을 차려 상황을 유추해본다.
얼마 전 아르헨티나와 포크랜드 섬을 두고 전쟁을 하게 된 영국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중간기지로 영국령인 그 섬을 사용 중이었는데, 너무 가까이 지나치려는 본선을 보고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자신들의 공군기로 가까이 접근하는 의아(?) 선박에 대해 일종의 무력시위를 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으로 매듭지으며 조심스럽게 통항을 계속하였다.
새벽의 그 해프닝은 하루쯤 안에 다시 지나치게 될 SAINT HELENA섬 역시 가까이 지나쳐 볼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볼까? 하던 나폴레옹 이란 역사적 인물에 대한 마음마저 사그리 걷어들이게 하여 될수록 더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지나치도록 침로를 수정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