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RESS 해협 통과를 위해서
평소 그곳은 마음 놓고 드나들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닌 뭔가 어렵고 불편한 상황이 잔뜩 기다리고 있는 그런 곳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어서였을까?
굳이 TOPRESS 해협을 통과해서 목적지인 GLADSTONE으로 오라는 용선주의 완강한 지시가 참 불편한 심기를 계속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하나 용선주 입장에선 가장 짧은 거리의 항로를 이용함이 연료유 등 경비를 줄이는 방안이니 토레스 해협을 이용하여 항해하라 지시함은 당연한 일이긴 하다.)
그곳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새로이 해도도 구비해야 하는데 그 장만에 적지 않은 돈도 든다. 용선주와의 용선 기간의 조정이 필요했던 회사가 나서서 그곳으로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유도해보겠다는 방안을 이야기했을 때 그에 기대를 하여 마지막 결정이 날 때까지 해도 구입을 유예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회사의 의도에 너무나 많은 기대를 갖게 되었고 하루를 그렇게 기다리며 지내다 보니 마음은 어느새 그곳을 가지 않는 것으로 결판을 내며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일이 어그러지며 결국 회사의 이야기는 없던 일로 되면서 무조건 용선주의 지시에 따라야 하게 되었을 때 바쁜 마음으로 해도 청구를 대리점에 하였다.
보급 요청에서 수취까지의 기간을 하루면 충분하다는 언질을 미리 받아두고 진행한 일이건만, 마닐라에서 파가빌라오까지의 교통체증이 계속 늦어지는 이유로 들먹여지니 초조한 마음으로 해도의 도착을 기다려야 했다.
출항 예정이 저녁 7시인데 다섯 시가 되도록 도착하지 못하여 계속 밀려나던 해도 운송인이 나타났다고 알려 온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며 시간을 보니 다섯 시 10분이다.
꾸러미로 만들어져 온 해도 뭉치를 브리지로 들고 가서는 풀어헤친 후, 우선 해도 매수를 헤아려서 이상 없음을 확인해 놓고 이번에는 내용을 한 장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신청한 해도 번호와 일치함을 확인했고 해도 매수까지 세어보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해도가 필요한 해도 개정을 하지 않은 상태로 공급되어진 것을 발견하며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부터 나온다.
직접 장수를 세어보고 번호를 확인하던 이항사와 같이 그런 상황에 봉착하여 한숨 쉬며 걱정이 잔뜩 깔린 표정으로 당장 로밍 전화를 꺼내 들어 본사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하고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보이는 나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대리 점원은 대금을 받으려고 하려던 말을 목구멍 뒤로 넘긴 채 아래로 내려간다.
한 장 당 100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사야 하는 해도인데 제대로 개정을 하지 않은 숫자가 꼭 절반인 14장이다.
그러나 그 열네 장을 지금 반송하여 제대로 된 해도로 바꾸려 해도 시간이 없는 바로 출항할 상황이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받아 들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야속하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누굴 원망한단 말인가? 회사의 관계되는 세 군데의 부서와 통화를 하며 우리의 현 상황을 알리고 우선은 그냥 수급받은 채로 떠나고 나중 TORRES에서 파이로트를 통해서 다시 제대로 수정된 같은 해도를 수급받을 각오까지 다지며 이 일을 끝내기로 한다.
이제 그렇게 된 해도를 그들이 일방적으로 붙인 높은 가격의 돈을 다 주고 사주기에는 약이 오른다.
우리는 똑같은 해도를 다시 사야 하는 입장에서 아무리 당신네가 돈을 다 주고 구입한 것이라 해도 그에 따를 수가 없으니 깎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건넨다.
우리 입장을 알았다며 자기네 보스와 이야기해보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간 그가 한참 만에 돌아와 내놓은 타협점은 개정이 안된 14장에 대해 장당 20달러를 깎아준 80달러만 받겠다는 제안을 해온다.
글쎄 더 요구하고 흥정을 하면 좀 더 가격을 낮출 수도 있어 보였지만 장사꾼도 아닌 처지에 바쁜 출항시간을 앞두고 있으니 이쯤에서 물러서기로 결정하면서 그렇게 하자고 응답을 준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장당 20달러 깎아준다는 14장을 더 올리고 280달러가 절약된 거로구나 계산을 끝내 놓고 그가 얼른 영수증에 그런 계산대로 고쳐 써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계산기를 가지고 한참을 두드리더니 겨우 찾아낸 액수로 수정한 영수증에 현금으로 받았다고 고쳐준 금액 밑에 서명을 한다.
이제 내가 돈을 지불할 차례이다. 나는 엊그제 이곳 대리점으로부터 회사가 보낸 현금을 받아둔 상황인데 그중에는 이곳 은행에서는 통용이 안 된다는 100달러짜리 구 화폐와 지질의 색깔이 짙어진 기분 나쁜 한 장도 있었는데 그걸 모두 그에게 주는 돈에다 함께 넣어서 내어주었다.
-당신네가 준 돈에서 그런 돈이 나온 겁니다.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은 눈치를 보며 내가 먼저 선수 처서 이야기하니 그는 인정한다며 더 이상 아무 말없이 그 돈을 받아 들었다
표정으로 봐서는 결코 받아 들고 싶지 않은 돈이겠지만 어쩌겠는가?
그들이 돈 묶음 다발의 중간에 넣어서 장난질 친 게 틀림없다는 증거라도 되는 그런 상황이 다시금 짜증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만 다 참고 마지막 서류에 서명을 해주고 끝내었다.
이들이 본선에서 어떠한 서비스를 하였는지 그 평가를 부탁한 설문지가 그 마지막 서류이다. 내가 거기에 뭐라고 써서 넘긴단 말인가 그냥 공 서명만 해서 넘겨진 그 설문지를 그는 잘 챙겨서 다른 서류뭉치와 함께 갈무리하고 이제 떠난다는 인사를 하며 일어선다.
배는 이미 도선사도 승선하였고 그들과의 서류 정리가 끝나면 바로 떠날 수 있게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로 전 부서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내가 브리지에 올라가며 출항 작업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