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중력
하늘을 누비는 조종사에게 비행이란 언제나 '선'을 넘는 일의 연속입니다. 산 능선을 넘고, 관제 구역의 경계를 넘으며 고도를 오르내리다 보면, 문득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물리적 영역과 거대한 자연의 힘이 격돌하는 보이지 않는 지점을 종종 마주하게 됩니다. 특히 헬리콥터 조종사에게 가장 경이로운 경계는 속도를 내며 나아가는 '순항 비행'과 허공의 한 점에 정지하는 '제자리비행(Hovering)' 사이의 찰나에 존재합니다.
전진하던 관성을 억누르며 기체를 허공에 묶어두는 바로 그 순간. 시선은 광활한 지평선에서 발밑의 좁은 지면으로 수렴되고, 집중력은 사건의 임계점에 다다른 듯 팽팽하게 당겨집니다. 마치 한 번 발을 들이면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다는 우주의 절벽,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을 넘나드는 긴장감과 닮아 있어 보입니다. 그 선을 넘는 순간, 헬리콥터 조종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물리 법칙 속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서 마주한 가장 거대했던 사건의 지평선은 푸르른 하늘이 아닌 지상에 있었습니다. 바로 조종간을 잠시 내려놓고, 커리어의 단절을 각오하면서까지 육아휴직을 선택했던 순간입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 쿠퍼 역시 저와 같은 조종사였습니다. 그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을 넘습니다. 그 너머는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는 암흑의 심연이지만, 역설적으로 그곳은 시공간을 초월해 딸 머피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됩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사랑이란 물리적 거리를 무력화하고,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점으로 잇는 보이지 않는 실과 같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가수 윤하의 노래 ‘사건의 지평선’은 이 천문학적 경계를 새로운 시작의 순간에 대입합니다. 저에게 육아휴직은 마치 인생의 '하버링'과도 같았습니다. 순항하던 커리어를 멈추고 아이라는 한 점에 온 신경을 집중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조종간을 내려놓고 직장에서 멀어지는 것은 마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었지만, 그 경계선을 넘어서자 아이의 눈동자 속에 담긴 은하수와 작은 손이 주는 몽실몽실한 행복감이 저를 붙잡아 주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일터로 돌아와 주말부부로서 아이를 만납니다. 주중의 그리움을 견디다 주말에만 재회하는 지금의 삶은 또 다른 사건의 지평선을 사이에 둔 상반된 경험입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순항 중일 때도, 제 마음의 조종간은 언제나 가족이 있는 가정으로 향해 있습니다. 쿠퍼가 블랙홀 너머에서도 딸의 시간을 느꼈듯, 저 역시 주중의 공백을 사랑이라는 보이지 않는 중력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결국 사건의 지평선은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익숙한 세계의 끝이자, 동시에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광활한 사랑이 시작되는 문턱입니다. 조종사로서 저는 하늘에서 길을 찾곤 했지만, 아버지로서 저는 이 경계들 너머에서 비로소 인생의 참된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커리어의 중단이나 주중의 헤어짐은 결코 추락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는 과정이며, 사랑이라는 연결고리가 시공간을 넘어 저를 지탱해주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저는 오늘도 그 강력한 사랑의 중력에 이끌려, 가족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목적지를 향해 비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