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 효율 곡선'이라는 단어가 있다. 언뜻 보기에는 뭔가 심오한 의미가 담긴 경제학 용어인가 싶지만, 다소 재미난 의미를 품고 있는 말이다. 이 용어는 보통 마감일이 닥치게 되면 초인적인 능력이 발휘되어 과제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되는 상황에서 주로 사용된다. 비단 과제를 해야 하는 학생뿐만 아니라, 업무를 하는 직장인이나 자기 계발을 하는 이들에게도 '과제 효율 곡선'이라는 단어가 쓰일 수 있지 않을까?
'벼락치기'라는 단어도 존재한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때가 되어서야 부리나케 공부를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공부는 평소에 미리미리 해야 한다"라는 말을, "벼락치기를 해서는 절대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다"라는 말을 학창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종종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상식과는 다르게 '벼락치기'를 할 때가 되어서야 우리의 집중력과 암기력이 빛난다는 사실! 놀랍지 않은가?
'명(明)'이 있다면, '암(暗)'도 존재하는 법. 최고의 능력이 뿜어져 나올 때, 그 이면에서 '조급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다는 사실! 곧 있으면 일을 치러야 하는데 당장 준비된 것은 하나도 없고,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 상황! MBTI 성격 유형 검사에서 '극 J'에 해당하는 나로서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오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내 좌우명은 늘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한다'였다. 미리미리 준비하고 계획해서 하루하루 정한 분량만큼 살아야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도 부담 없이 하루를 맞이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계획하고 실행하고, 그 후 다시 계획하는 일은 어려서부터 일상이었다. 그렇게 20년을 넘게 살았고 덕분에 성취하고 이룬 것도 많았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 남자아이라면 한 번쯤은 장래희망으로 '조종사'를 꿈꾸었을법하지만, 나는 '조종사'라는 직업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비행학교에 입교를 하였고 그 길로 조종사가 되었다.
뼛속 깊이 '문돌이'였던 나는 비행과 관련된 이론을 공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항공역학, 기상학, 정비학 등등 난해한 용어와 이론이 가득한 내용을 이해하느라 잠 못 드는 날이 계속되었다. 사실, 이론 공부는 노력하면 어떻게든 된다고 생각했다. 내용이 어렵더라도 잠을 줄여가며 계획대로 공부하면 어렵지만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실기, 조종이었다.
조종은 잠을 줄인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두 손에 빗자루를 쥐어 본들 조종간이 손에 익는 것도 아니었고, 눈을 감고 항로를 떠 올려 본들 조종석에 앉아 하늘을 누비는 상황에 도저히 가닿을 수 없었다. 비행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그 시간 안에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짐을 싸야 하는 상황도 너무나 힘들게 느껴졌다.
당장 내일을 계획할 수 없었다. 지금 내 수준을 돌아볼 여유도 능력도 없었다. 평가의 순간은 매주마다 다가오는데, 정작 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것은 없으니 조급함은 날로 날로 커져만 갔다. 고3 때조차 걸리지 않았던 대상포진 때문에 앓아누울 정도였으니, 그 당시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몸과 마음에 난 상처를 메워가며, 걸어야 할 때 뛰고 뛰어야 할 때 더 열심히 뛰면서 그렇게 조종사가 되었다. 힘든 교육과정을 거치며 배운 것은 단순히 조종기술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걷지 못해도, 내일 뛸 수 없어도,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길은 분명히 있다는 겸허함을 배운 것이다.
인생은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다 돼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내게 주어진 일을 다 한 뒤,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뿐이다. 어쩌면 육아도 마찬가지 아닐까?
각종 블로그, 카페 글에 올라오는 많은 육아일기를 보면, 우리 아가는 잘 자라고 있는 것인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조종 교육생 때를 떠올려본다.
"아기는 키우기 위해서 낳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낳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 그저 사랑스러운 눈으로, 따뜻한 손길로 아가를 돌보는 것, 그리고 아가 스스로 인생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기다리며 응원해 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전부가 아닌가 싶다.
우리 아가에게는 오늘 걷지 않아도, 내일 뛰지 않아도,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아빠는 그냥 너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사랑한다 우리 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