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조종사가 된 지 만 7년, 조종간을 잡은 지 만 8년이 훌쩍 지났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이따금씩 계류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육중한 쇳덩어리가 지면을 박차고 이륙하는 그 순간의 짜릿함 때문에 비행의 매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아! 지금은 육아 휴직한 조종사이기에 표현을 수정해야겠다. 짜릿'했던' 기억 때문이라고.
요즘은 아가와 함께 시원한 에어컨을 틀어놓고 거실 바닥을 뒹구느라, 문밖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좀처럼 가늠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따금씩 거실 창 너머로 들려오는 헬리콥터 소리는 더위와 싸우며 비행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 준다.
아주아주 뜨거운 여름날, 자동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는데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어떤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혹시나 하겠지만 역시나 그렇다. 내가 조종하는 헬리콥터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
헬리콥터 조종석 계기판 구석을 살펴보면, 항공기 외부 온도가 어떠한지 확인할 수 있다. 여름날에는 보통 '40'에 육박하는 숫자가 표시된다. 외부 온도가 그러하다는 것이지 항공기 내부, 조종석에서 느끼는 체감 온도는 아마 아마 그보다 훨씬 더 높을 가능성이 크다.
조종석에 앉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척 고역이지만, 사실 조종석에 앉기 전까지도 만만치 않은 난관을 거쳐야만 한다. 항공기가 이착륙하는 활주로, 계류장은 시꺼먼 아스팔트와 새하얀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다. 그늘 한 점 없는 이 광활한 공간은 뜨거운 여름날의 태양볕을 조금의 숨김도 없이 있는 그대로 가득 머금고 그 위에 놓여 있는 모든 것들을 펄펄 끓여댄다. 이 끓는듯한 더위를 피할 수 유일한 방법은 어서 빨리 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뿐.
항공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뜨거운 계류장 위를 짧게는 몇 백 미터, 길게는 그 이상을 터벅터벅 걸어야 한다. 헬멧을 포함하여 각종 장비들을 챙겨 들고 말이다. 항공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조종복은 물론, 속옷까지 흠뻑 젖어 있는 상태이다. 이제 조종석에 올라타서 서둘러 시동을 거느냐? 그렇지 않다. 외부 점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엔진 커버를 하나하나 벗기고 엔진 룸 덮개를 열어젖힌 후 오일이 샌 곳은 없는지, 연료는 가득 차 있는지, 동체 표현에 손상된 곳은 없는지 등등 점검표 항목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세심히 살펴야 한다. 연료 내 이물질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항공기 바닥면으로 몸을 구겨 넣고 연료 샘플도 채취해야 한다. 이렇게 시동 전 점검을 마치는 데도 빨라야 30분이다. 아직 시동도 걸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더위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제 시동을 거는 건가?' 맞다. 그런데 키만 꼽고 돌린다고 시동이 걸리는 건 아니다. 이륙 전까지 조종석에 앉아 수행해야 할 절차는 무렵 70여 가지에 이른다. 이 70여 가지를 수행하는 데도 대략 20-30분이 소요된다. 이 무더위에 20-30분이라니... 하... 외부 온도를 나타내는 숫자가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여기까지만 쓰면 일에 대한 불평불만만 가득 늘어놓은 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일을 무척 사랑한다. 이렇게 사랑하는 일을 발견했다니!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잠시 일터를 떠나 멀찍이 나의 일을 바라보니, 내가 나의 일을 사랑한다고 여겼던 것이 더욱 분명해짐을 느낀다.
일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고, 그 때문에 도망치듯 감행했던 두 번의 이직 끝에 지금의 일을 찾게 되었다. 결국 사랑하는 일을 발견했지만, 그 과정에서 깨달은 점이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언제나 좋은 일들만 가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내야 한다. 좋아하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 삶의 일부분을 희생하기도 해야 하고, 사랑하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하기 위해 지금 가지고 있는 그 무언가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사랑하는 일을 하는데 그깟 더위쯤이야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그토록 사랑하던 일을 내려놓을 정도로 더욱 사랑에 빠진 일을 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쳐도 전혀 아깝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아니면 누구도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냐면!? 바로 육아이다.
안타깝게도 육아라는 일은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지도 못하고, 당장 눈에 들어오는 보상도 없다. 하지만 지금 바로 이 순간, 오로지 아빠인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가슴이 뜨거워진다. 가끔 몸과 마음이 너무 고되기도 하지만, 힘들기 때문에 더욱 값진 일이라고 생각하면 없던 힘도 솟아나는 듯하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그의 희곡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왕관이 참 무겁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