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가 있는 사람이 자동차에 시동 거는 방법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방법이 매우 간단하기 때문이다. 그저 브레이크 페달을 꾸욱 밟은 상태에서 꽂혀 있는 시동 키를 돌리거나, 혹은 시동 버튼을 누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차에 시동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거나, 여러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지 않다. 그렇다면 헬리콥터에 시동 거는 방법은 어떠할까?
헬리콥터에도 시동키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자동차에 시동 거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꽂힌 키를 돌리면 그만일까? 생각이 떠오른 김에 휴직하며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조종사 점검표'를 펼쳐보았다. 헬리콥터는 기종마다 시동에 필요한 절차나 항목이 조금씩 상이하다. 내가 조종하는 기종의 경우, (외부 점검 절차를 제외하더라도) 이륙 전까지 수행해야 할 절차가 무려 70여 가지에 이른다. 엔진 시동 절차를 실시하기 전까지 점검해야 할 항목이 40여 가지, 엔진 시동 절차에 필요한 항목이 10여 가지, 그리고 엔진 시운전에 필요한 항목이 20여 가지나 된다. 그 과정 중간에 시동키를 꽂고 돌리는 절차도 포함되어 있다.
오랜 시간의 비행 경력을 보유하고 있는 조종사라면, 굳이 점검표가 없다 하더라도 떠듬떠듬거릴지언정 시동을 걸고 끄는 일을 어렵게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조종사라면, 매 시동시마다 점검표에 표시되어 있는 항목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피면서 시동 절차를 진행하고자 할 것이다.
1. 점검표에 표시되어 있는 항목 하나하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눈으로 읽고,
2. 스위치가 있는 곳에 손을 가져다 댄 후,
3. 해당 스위치가 점검표에 표시되어 있는 스위치가 맞는지 다시 한번 살펴본 뒤,
4. 스위치 조작 후 계기판에 시현되는 이상유무를 확인하는 절차까지 빼놓지 않고 말이다.
심지어 기장과 부기장 두 명의 조종사는 매 시동시마다 서로의 조작을 상호교차(Cross-check) 확인하며 절차를 진행한다. 한 명은 절차를 호창 하며 상대방의 행동을 확인하고, 다른 한 명은 상대가 호창 하는 절차를 직접 수행함과 동시에 스스로 점검표를 보고 한 번 더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참 복잡 다난? 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중간 과정에서 절차의 누락이 생기면 이후 진행하는 여러 단계에서 악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주의에 주의를 기울이며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장비의 고장을 유발하는 것은 물론, 여러 생명을 앗아갈 수 있음을 늘 기억하면서 말이다.
그래서일까? 조종사는 대부분의 업무에서 점검표를 대하는 것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점검표(체크리스트)'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어떠한 일을 하거나 행사 등을 진행할 때 준비 사항을 잊지 않기 위해 적어 놓는 목록"이라고 되어 있다. 이 정의의 핵심은 아마 '잊지 않기 위해'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아뿔싸! 오늘도 깜빡하고 말았다. 손소독제... 분명 다 챙겼다고 생각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는데 오늘도 빼먹고야 말았다. 저번에는 공갈젖꼭지를 놓고 왔고, 그 저번에는 손수건을, 그 저저번에는 물티슈를 깜빡했는데 말이다.
아기가 눈도 제대로 못 뜨던 갓난쟁이였을 때만 해도, 감히 이 작고 연약한 생명체를 집 밖에 데리고 나가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혹시나 외부에서 몸에 좋지 않은 균 때문에 아기가 병에 걸리진 않을까, 엄마·아빠의 부주의로 아기가 어디에 부딪혀서 다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엄마·아빠의 생존?을 위해 아기가 자는 때에 맞춰 호다닥 집을 탈출하고 있다. 외출 시도가 늘 즉흥적으로 결정되는 터에 그야말로 '호다닥'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데, 그럴 때마다 늘 한두 가지씩 빼먹는 게 생기곤 한다. 그리하여 오늘은 손소독제를 빼놓고야 말았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크게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또 어떠할지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외출 시 준비물을 빼먹지 않기 위해 '점검표'를 만들어볼까 한다. 물론... 만드는 것을 깜빡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기를 놓고 외출하는 대참사만은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