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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장 Jan 20. 2024

"아!아! 들리는데, 잘 안 들린다? 오바!"


출처 : 광주시, 우회전 전용신호등 설치 (metroseoul.co.kr)



  귀가 있다고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멀리서 들려오는 엄마의 "밥 먹어라!"라는 말씀은 귀가 있다면 똑똑히 들을 수 있는 소리지만, 좀처럼 우리 인식 속에 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앞서 언급했던 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엄마의 외침뿐만이 아니다. 카페에 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잘 들리던 음악 소리가 귓가에서 지워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할 때면, 누군가의 기침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그리고 의자 끄는 소리 등등의 잡음들이 어느 순간부터 음소거 기능이 켜진 것처럼 자취를 감춘 것처럼 느껴본 적도 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고요함이 가득한 그 순간을 깨는 소리가 있었으니. 바로 누군가가 부르는 나의 이름 소리! 고막에는 소리를 거르는 거름망이라도 있는 것일까?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조종사에게는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무척 중요하다. 조종사는 비행을 할 때 필요한 대부분의 정보를 '눈'을 통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속도계, 고도계, 승강계 등의 계기를 눈으로 살피는 것에서부터, 전방 장애물, 근접해 있는 다른 항공기, 이·착륙해야 하는 활주로 상황 등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까지 말이다. 



  그런데 눈에 비해 상대적으로 '귀'의 역할과 중요성은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듯하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귀'야말로 다른 어떤 감각기관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도 말이다. 항공기 안에서는 그야말로 "귀를 찌르는듯한" 엄청난 소음을 견뎌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비행하는 내내 조종사의 '귀'는, 매분 매초 '소음으로부터 찔리는 고통'을 참아내며 제 역할을 다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최악의 근무 조건에서도 묵묵히 제 역할을 다 해내고 있는 것이 바로 조종사의 '귀'가 아닌가 싶다.



  귀의 고군분투는 단순히 소음을 견디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늘의 신호등은 도로의 신호등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들어야 한다. 잘 듣지 못해 신호를 지키지 못한다면 아주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때문에 귀는 엄청난 소음을 견디는 것에서 더 나아가, 주어진 신호가 무엇인지 분명히 캐치(Catch) 해내야만 하는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조금 시끄럽더라도 귀 기울여 잘 들으면 된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하늘의 신호등은 우리가 흔히 보는 빨간불, 노란불, 초록불처럼 간단명료하지 않다. 하늘의 신호등은 지상에 위치한 관제사가 무전을 통해 전달하는 여러 지시와 조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관제사의 말을 잘 듣고 이해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관제사의 지시는 지상의 무전기에서 발사되는 전파에 실려 하늘에 떠있는 항공기에 닿음으로써 전달된다. 무전기에서 발사되는 전파는 직진성의 성질을 갖는데, 비행기는 고고도에서 비행하기 때문에 비행기에 전달되는 전파는 상대적으로 외부의 간섭이 적은 편이다. 



  하지만 지표면에 바짝 붙어서 비행하는 헬리콥터에 전달되는 전파는 산, 건물 등의 장애물 등에 의해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말인즉슨, 헬리콥터 조종사가 듣는 신호등의 신호가 '흐릿하다'는 의미이다.



  신호가 흐릿하기만 하면 다행이다. 흐릿해진 신호에 여러 조종사들의 교신 소리가 더해짐으로써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편도 1차선 도로와 편도 4차선 이상의 큰 도로를 떠올려보자. 좁은 길에서 신호등의 신호를 기다리는 차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폭이 넓은 대로에서 신호등의 신호를 기다리는 차는 아주 많을 가능성이 크다.



  이 말은, 교통량이 적은 이·착륙장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교통량이 많은 이·착륙장의 경우 신호를 대기하는 헬리콥터가 무척 많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흐릿한 신호에 귀 기울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흐릿한 신호 속에서 다수의 조종사가 서로 신호를 달라고 아우성치는 상황이 만들어지면, 그 상황에 놓인 조종사의 귀는 그야말로 '멘붕'에 빠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 그럼 여기서 끝이냐? 안타깝게도 마지막 난관이 남았다. 바로 신호등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사람들은 보통 하나의 스마트폰만을 사용한다. 나를 찾는 통신 수단이 하나에 그친다는 말이다. 하지만 헬리콥터의 스마트폰, 즉 헬리콥터의 무전기는 하나 이상일 수 있다. 무전기가 하나 이상일 수 있다는 말은, 조종사를 찾는 곳이 여러 곳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예를 들어보자. A 무전기를 통한 주파수에서는 본부와의 통신을, B 무전기는 같은 본부 소속 항공기와의 통신을, 그리고 C 무전기는 관제기관과의 통신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세 개의 무전기를 다 켜놓고 비행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정말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쉼 없이 흘러나오는 교신 중에서 언제 어디서 나를 찾는 외침이 들릴지 모르니 말이다. 



  비행경력이 얼마 되지 않았던 때만 해도, 늘 교신 때문에 근심이 많았다. 귀를 아무리 기울여도 나를 찾는 외침이 당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교신 소리에만 집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귀를 열심히 기울이다 보면 외부 경계를 소홀히 하게 된다던가, 속도와 고도 제원을 잘 못 맞추게 된다던가, 동승한 기장님의 지시나 요청을 듣지 못하게 된다던가 하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깐깐한 성격의 기장님과 비행을 할 때면 더욱 바짝 쫄 수밖에 없었다. '들리는데 안 들리는 걸? 워찌합니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고 비행 경력이 쌓이면서 들리는데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드디어 '들리기' 시작했다. 아주 개미같이 작은 소리임에도 나를 부르는 콜사인(Call-sign) 만큼은 또렷하게 들렸고, 왁자지껄한 시장통 같은 소음 가운데에서도 나에게 말하는 내용만큼은 아주 선명해졌다. 



  두 손과 발이 조종간을 밀고 당겨야 하는 상황에서도, 눈으로 좌·우··아래를 살펴야 하는 상황에서도, 입으로 필요한 정보나 지시를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나를 찾는 소리, 나에게 말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일 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집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듣지 못한다. 심지어 아내는 아주 잘 듣는데, 나는 좀처럼 들을 수가 없다. 그것은 바로! 한밤중 아기의 울음소리. 이따금씩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 먼저 깨어 있는 아내를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아내의 눈이 퀭해 있다. 잘 못 잤냐고 물으면 간밤에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잠을 설쳤다는 것이다. '으흠... 나도 피곤한 척을 해야 하는 것인가...ㅋ'



  육아라는 조종석에 오를 때면, 나는 아직 신참 부기장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 가정의 기장님, 아내님을 잘 모셔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오늘도 육아 세계로 날아오르며 "안전비행!"을 외쳐본다!

  


출처 : '女기장 미모 실화? 화보인 줄'…미인대회 휩쓴 그녀의 정체 '깜짝' | 서울경제 (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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