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장 Jan 27. 2024

육아, 조종사가 되기 위한 최고의 경력

영화 <탑건 : 매버릭> 의 한 장면



  조종사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이따금씩 지인을 통해 진로 상담을 요청받았을 때가 있었다. 지인의 자녀가, 혹은 지인의 아는 이가 '조종사'라는 직업을 갖고 싶어 하는데, 한 번 이야기를 나누어달라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질문이 있었다. 바로 '조종사가 갖추어야 할 자질'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처음 이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만 해도, 나 스스로 느끼기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많은데 정리가 안 된 상태였다고나 할까? 그 당시에는 조종사로서 경력이 짧기도 했고, 조종사라는 직업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볼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행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다양한 유형의 임무를 경험하다 보니 '조종사가 갖추어야 할 자질'이 무엇인지 몸소 깨닫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갖추어야 할' 자질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다소 모순이 있는 듯하다. 조종사가 '갖추면 좋을 것 같은' 자질이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조종사가 된 나조차 아직 그러한 자질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어찌 되었던, 조종사가 갖추면 좋을 것 같은 자질은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강인한 체력이다. 비단 비행뿐만 아니라 모든 일은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지속할 수 있다. 특히 업무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조종사라는 직업의 경우, 튼튼한 체력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조종사는 좁은 칵핏(Cock-pit) 안에서 오랜 시간 항공기의 진동을 온몸으로 견디며,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비행해야 한다. 극한 상황에서도 항상 집중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체력이 좋지 않으면 쉬이 지치게 되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은 비단 조종사의 목숨뿐만 아니라, 하늘 아래 있는 많은 무고한 시민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는 계획적인 성향이다. 조종을 업으로 삼는 이가 매사에 즉흥적이어서는 곤란하다. 모든 임무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기반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치밀한 계획만이 임무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고, 임무의 완성도를 높인다는 것은 곧 안전하게 임무를 마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조종사에게는 작은 사고도 많은 인명 손실을 야기할 수 있음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말인즉슨, 일상의 작은 일도 계획하지 못하는 성격이거나 자기 관리를 어려워하는 성향의 사람이라면 조종사로서 일하는 게 무척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을 나는 것이 자유로워 보일 수는 있으나, 실제 조종사의 세계는 분, 초 단위로 아주 촘촘하게 짜여 있다. 



  '지금까지 별일 없었으니 이번에도 별일 없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조종간을 잡았다가는 맹세코 여러 사람 잡을 일이 생기고야 만다. 여러 번 강조하지만, 항공기 사고는 작은 사고라도 많은 인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세 번째는 위기대처능력 즉, 순발력이다. 앞서 조종사에게는 계획적인 성향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계획은 정말 계획일 뿐이다. 조종사의 세계는 분, 초 단위로 촘촘하게 짜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임무를 하다 보면 계획과 항상 어긋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따라서 조종사는 실제 상황이 계획과 달라졌다 하더라도,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맞게 적절히 대처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혹시라도 상황 판단을 잘못한다거나 주어진 조건을 잘못 해석할 경우, 조종사는 매우 불리한 여건에서 임무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때로는 계획을 빠르게 수정하는 결단력과, 과감하게 임무를 포기하는 용기를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순간의 판단이 하나뿐인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조종사에게 무엇보다 순발력이 강조되는 이유이다.



  네 번째는 인내심이다. 조종사의 업무 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더운 날에는 더운 곳에서, 추운 날에는 추운 곳에서 임무를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여름날이면 복사열이 지글지글 올라오는 계류장을 걷느라 조종석에 채 오르기도 전에 속옷까지 땀으로 흠뻑 젖는 경우가 다반사다. 허연 입김을 내뿜는 겨울날이면 손끝과 발끝, 귀를 애리는 추위 때문에 온몸이 찌그러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비행 중 발생하는 소음, 진동 등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조종사가 견뎌야 하는 것은 비단 육체적인 고통뿐만이 아니다. 



  변화무쌍한 날씨는 임무를 하기 전은 물론, 임무를 하고 있는 중에도 지속적으로 조종사를 압박한다. 오랜 시간 협조하고 계획한 일이 순식간에 어그러지는 경우도 허다한데, 그때마다 조종사는 허무함, 허탈함을 느끼며 때로는 분노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종사는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감정이 격앙되면 판단을 그르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료와 불화를 일으키게 되어 조종사의 가장 큰 밑천인 '관계의 힘'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조종사는 늘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인내심'을 필히 갖추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배려심이다. 조종사의 일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서 존재하는 일이다. 승객을 빠른 시간 안에 이동시키는 일, 사람의 손길이 쉽게 닿지 않는 곳에 화물을 운반하는 일, 응급 환자를 신속하게 후송하는 일, 인력으로 진화가 불가능한 산불을 진화하는 일, 통신 장애가 발생하는 곳에서 중계기 역할을 하는 일 등등, 조종사의 일이라는 것은 결국 나의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돕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조종사가 다른 이보다 스스로를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행동하고자 한다면 그는 이미 조종사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항공기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순간, 그 항공기는 더 이상 조종사 혼자만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조종사는 적어도 나만큼 다른 이를 아끼고 존중하는 배려심을 가져야만 하며, 부단히 이타적인 마음을 갖기 위해 스스로를 수양해야 한다.  



  육아 휴직을 시작할 때만 해도 걱정이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조종사로서 부족한 것이 많은데, 휴직기간 동안 조종사로서 가져야 하는 지식이나 기량이 퇴화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년 넘게 육아를 하다 보니 조종사가 갖추어야 할 자질을 더욱 확실하게 갖출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육아'를 하는 것이었다. 특히 갓난아기를 돌보는 경험은 조종사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육아를 하면 조종사가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자질을 고루 갖출 수 있다. 먼저, 체력. 육아를 하는 동안 아기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통에 쉬이 잠을 이루지 한다. 하지만 언제든지 아기가 부르면 눈을 번쩍 뜨고 달려가야 하며, 그 와중에 청소며 빨래며 궂은일도 마다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저절로 강인한 체력을 기르게 된다.



  두 번째, 계획적인 성향. 기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 아기를 돌보기 위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무엇하나 놓치는 것 없이 꼼꼼히 챙길 줄 알아야 한다. 처음에는 다소 우여곡절을 겪을 수 있지만, 아기의 일거수일투족 챙기다 보면 시간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능력을 터득하게 된다.



  세 번째, 순발력. 아기는 결코 부모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특히 갓난아기의 경우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존재이다. 특히 아기는 '울음'으로 모든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에, 아기가 울 때마다 재빠르게 문제를 파악하여 대처해야만 한다. 설사 순발력이 떨어지는 이였다 하더라도, 육아를 하면서 우는 아기를 달래다 보면 의지와 상관없이 순발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네 번째, 인내심과 다섯 번째, 배려심. 아기를 돌보는 이에게 인내심과 배려심을 논하는 것은 두말하면 입 아픈 것 아니겠는가? 





  신생아 수가 역대 최저치를 지속적으로 갱신해가고 있다고 한다. 인구 감소에 대한 많은 우려 때문에 다양한 육아 지원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된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 듯하다.



  이 시점에서 문득 '육아 경력자를 조종사로 특별 채용하는 정책을 도입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국가적으로도 우수한 기량을 겸비한 조종사를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아빠와 엄마들에게도 긍정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비행 기량 향상을 위해 기성 조종사들의 육아 휴직을 필히 의무화하는 것도 좋은 정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덧붙여본다.


  유경험자로서 그 효과는 100% 장담할 수 있다. ㅋ





이전 11화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잖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