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처음'의 순간이 존재한다.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악기를 배우기 시작한 때, 수영 강습 수업에 처음으로 출석한 날, 성인이 되어 난생처음으로 왁자지껄한 주점에 들어선 때, 입사한 회사에 처음으로 출근한 날 등등 말이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극 중 인물 백이진이 신문배달을 처음 접해본 것처럼.
'처음'이라는 그 순간은 누구에게나 낯설기 마련이다. 낯설기 때문에 두렵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설레기도 하다. 하지만 '남의 시선 신경 쓰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리나라 사람들은, '처음'이라는 시간을 무척 부담스럽게 느낀다. '혹시라도 내가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서, 다른 이들로부터 망신을 당하진 않을까'라는 걱정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처음부터 잘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는 사실을. 아마 이 사실을 백이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헬리콥터 조종사인 나도, 조종사로서 접한 처음의 순간이 참 많았다. 처음으로 조종석에 앉아 하늘로 날아오르는 경험을 했을 때, 교육생이 되어 처음으로 조종간을 잡고 직접 헬리콥터를 움직여보았을 때, 부기장 자격을 획득한 후 출근한 회사에서 첫 임무를 수행했을 때, 그리고 기장이 된 후 맡겨진 첫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을 때 등등 말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첫 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기장이 된 후 첫 임무를 다녀왔을 때를 꼽고 싶다.
기장 자격 획득 평가를 통과하면 기장의 자격이 주어지지만, 바로 기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회사 자체 시스템에 의해 시운전 절차에서부터 관제권 내의 로컬(Local) 비행, 근거리 비행, 원거리 비행, 그리고 산불진화 임무 등의 고난도 비행임무까지 교관조종사와 동승하며 별도의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모든 검증 과정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진짜' 기장으로서 단독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자격 획득을 위한 평가 비행을 할 때도, 기량 검증을 위한 교육 비행을 할 때도 교관 조종사가 동승하지만, 동승한 교관 조종사는 비행 조작에 대해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이따금씩 현재의 비행 상황에 맞는 조언을 건넬 뿐, 비행 전(全) 과정에서 모든 판단과 행동은 평가 혹은 검증을 받고 있는 조종사에게 달려있다. 하지만 언제든지, 여차하면 조종간을 넘길 수 있는 상대(교관 조종사)가 옆에 있기 때문에, 기장의 자격으로 비행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부담스럽거나 두렵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시간은 흘러 흘러, 결국 나에게도 피할 수 없는 '처음'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첫 단독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첫 단독 임무가 가장 난도 높은 산불진화 임무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더욱 큰 문제는 한 번도 산불진화 임무를 경험해 본 적 없는 부기장과 임무에 편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실제 산불 진화 임무가 아닌, 산불 예방을 위한 예방 살수 임무였다는 점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여차저차 임무를 잘 준비하여, 별 다른 이상 없이 계획된 항로에 올랐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강한 바람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계획대로였다면, 항로상에서는 부기장에게 조종간을 넘기고, 기장인 나는 관제교신을 포함하여 전반적인 비행 상태를 관리·감독하는 역할에 집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계속 거세지는 탓에 결국 부기장으로부터 조종간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나도 나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초심자의 행운은 없는 것입니까'라며 맑고 푸르른 하늘을 원망했다.
예방 살수를 위해 물을 뜨고 뿌리는 와중에도 거세진 바람은 좀처럼 잠잠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담수지와 살수지역이 가까운 게 천만다행이었다. 조종석 전자계기 화면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수치의 풍속이 푸른빛으로 빛나며, 연신 내 눈을 향해 쏘아대듯 말하는 것 같았다. '너 지금 조심해야 돼! 절대 긴장 늦추지 마!'라고.
기장의 불안한 마음은 통신 헤드셋을 통해 부기장과 승무원들에게 전해진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방식', 혹은 '거친 말투, 빠른 억양'등으로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말이다. 기장이 불안해하면 동승한 부기장은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조종석 뒤편 좌석에 위치하고 있는 승무원들은 전방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동요할 수밖에 없다. 기장이 침착함을 잃게 되면 기장뿐만 아니라 모두가 위험해지는 것이다.
휘청휘청 바람에 흔들리는 동체를 안정시키느라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고, 조종간을 쥐고 있는 손에서는 경련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침착함을 유지해야만 했다. 적어도 침착한 '척'이라도 해야만 했다. 기장만 바라보고 있는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부기장과 승무원들은 나의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조종간을 쥐고 있는 나의 두 손의 떨림을 볼 수 없었다. 애써 차분하고 온화한 목소리를 들려주려 했는데, 의도대로 되었는지 모르겠다.
임무를 마치고 기지로 복귀하기 위해 기수를 돌렸다. 다행히 바람은 잦아들었고, 부기장에게 조종간을 넘기고 한숨을 돌리려던 때였다. "선배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는 기장 못할 것 같습니다. 어우..."라고 후배 부기장이 말문을 열었다. 몇 년 전 나도 비슷한 상황에서 똑같은 말을 선배 기장에게 건넸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를 떠올리며 후배 부기장을 바라보니 과거의 나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도 후배 부기장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처음이 어려운 거지, 다 할 수 있고 하게 되어 있더라고요. 그런데... 오늘은 너무 어려웠네요... ㅋ"
그 때로부터 몇 년이 지났고, 나는 어느 순간 아빠가 되어 버렸다. 아빠가 되어 집에서 아가를 돌본 지 벌써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초보아빠 딱지를 떼지는 못한 것 같다. 조종은 '하다 보면 다 할 수 있고 하게 되어 있다'라는 말이 적용되는데, 육아는 '하기는 하는데 잘하는 건지 아닌 건지... 애라 모르겠다 일단 하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듯싶다.
'처음'을 생각하다가,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 하나>의 극 중 인물인 백이진의 대사를 떠올렸다. 백이진이 처음으로 신문을 배달하던 날, 배달이 조금 늦었다며 화를 내는 어느 아저씨를 향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잖아요. 그 처음이 오늘이니까 오늘까지만 서툴겠습니다"라고. 처음은 누구나 서툴다. 그러니 남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조금 관대해져 보는 것은 어떨까.
그나저나 초보아빠는 언제까지 서툴기만 할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