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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장 May 22. 2024

너의 모든 순간




  너를 처음 만난 장소는 어느 산부인과 수술실 앞 복도였단다. 간호사 선생님이 네가 누워있는 작은 인큐베이터를 가지고 와서는, "손가락 10개 이상 없고요, 발가락도 10개 이상 없습니다. 눈은, 코는, 입은, 귀는..."이라며 설명을 이어갔지만, 사실 아빠는 귀담아듣질 못했단다. 엄마에게 받은 미션을 수행해야 했거든. 


  엄마로부터 주어진 미션은, 너를 처음 만나는 순간을 촬영하는 것이었단다. 그래서 아빠는 너와의 첫 순간을 즐길 여유가 없었지. 그렇다고 엄마 탓을 하는 것은 아니야. 엄마가 미션을 주지 않았더라도, 아빠는 '어안이 벙벙'해서 너와의 첫 순간을 데면데면하게 보냈을 것이 분명하거든. 


  불행 중 다행으로, 간호사 선생님께서 너의 발을 만져봐도 된다고 했단다. 그래서 아빠는 너의 발에 아주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다 댔는데, 뭐랄까... 여태껏 느껴본 적이 없는 감촉이었다고나 할까? 그제야 비로소 아빠는 '진짜 아빠가 되었다'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단다.


  너와 처음 만나는 순간을 열심히 촬영한다고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네가 인큐베이터 안에서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던 터라 너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단다. 나중에 촬영한 영상을 통해 자세히 보니, 투명한 인큐베이터 너머의 너의 모습은 아직은 엄마 뱃속이 더 잘 어울리는 '누우런 찹쌀떡?'이더라. 


  너와 만났던 두 번째 시간,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빠는 그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단다. 엄마는 병실에서 회복 중이었기 때문에 아빠 홀로 휴대폰을 챙겨 들고 네가 있는 신생아실로 면회를 갔었지. 유리 벽 건너편에서 간호사 선생님이 아빠를 향해 너를 번쩍 들어 보여주는데... 웬 보랏빛 고구마가 등장해서 무척 당황스러웠단다. '누우런 찹쌀떡이었으면 어땠으려나...' 하는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아빠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거무튀튀한 보랏빛 피부뿐만이 아니었단다. 정돈되지 않은 젖은 머리칼, 뜨다만 듯한 작은 눈, 흔적만 남아 있는 눈썹... 분명 엄마 이름이 적혀 있는 이름표가 너의 머리 위에 놓여 있었는데, 왜 엄마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것인지... 꼬물거리는 너의 모습을 동영상에 담으면서, 엄마에게 어떤 '심심한 위로'를 건네야 할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건강하고 씩씩하게 크면 되는... 거지 뭐!'라고 생각했던가? 


  그날로부터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구나. 푹 쪄진 고구마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검은색 눈동자가 밝게 빛나는 핑크빛 밀가루가 되었다는 사실! 신기하게도 1년 전 사진과 지금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단 말이지! 


  누워서 멍을 때리기만 할 것 같던 너는 오른쪽, 왼쪽으로 몸을 뒤집기 시작했고, 어느새 오른팔, 왼팔을 뻗어대며 두 다리를 끌고 다녔지. 한참을 그렇게 팔로만 방바닥을 쓸고 다니다가 어느 순간 두 발을 쭉쭉 뻗어 바닥을 밀어대더니, 결국에 무릎을 세워서 두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번개 같은 속도로 기어 다니는 능력을 터득했단다. 그리고 지금은, 위대한 한 걸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태랄까? 언제 이렇게 훌쩍 컸을까! 



  너의 첫 생일을 며칠 앞둔 지금, 아빠는 "너의 모든 순간"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단다. 그저 두 남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노래의 가사가, 네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너와 함께 하고 있는 아빠의 마음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해 주고 있어서 무척이나 놀랍게 느껴진단다. 


  아빠의 세상은 네가 태어나기 전과 후로 나뉜단다. 네가 자면서 새근새근 내뱉는 숨에서 따스함을 느낄 수 있고, 아빠를 향해 미소 짓는 너의 얼굴에서 맑고 밝은 햇살을 볼 수 있단다. 


  가끔 아빠의 몸에 착 달라붙어 안겨 있을 때면, 정말 '빈틈없는 행복이 여기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잠시 너와 떨어져 있는 순간에 네 생각만 하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단다. 


  너와 함께한 시간, 아빠의 삶은 모든 순간이 너로 채워져 있단다. 하지만 너는 모르겠지. 아마 '그때'가 될 때까지 아빠의 마음이 어떠한 마음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언젠가 알게 될 거야. 그때가 될 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평생 쭈-욱 아빠는 너를 많이 많이 사랑할 거야.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생일, 많이 많이 축하해! 

  우리 아가 정말 정말 사랑해!    


  2024년, 따뜻한 봄날에,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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