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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경록 Oct 09. 2023

<집안일은 명상이다.>

뭔가 해답이 보이지 않고 마음이 답답할 때 체스를 두듯 집안일을 시작하자


며칠 전에 주문한 조립식 철제 수납장이 도착했다. 생각보다 부품이 많았다. 성급하게 접근하면 나사가 휘어지거나 잘못 조립하다 얇은 철판이 찌그러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어렸을 적 과학 상자나 레고 조립하듯이 놀이로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영화 ‘메리 포핀스’에서 방 청소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가정교사인 메리 포핀스가 ‘모든 일에는 재미있는 요소가 있어’라고 말한다. 재미를 많이 발견하는 것이 풍요로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신기하게도 한 면 한 면 이어 붙이니 형체가 생겨나고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나고 존재의 의미가 생겨났다. 너저분하게 널려있던 조각들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같았는데, 철제 수납장이 형태를 드러내면서 마음도 정리되는 느낌이다. 분명 몰입했고 수수께끼 풀듯 퍼즐을 맞추며 해답을 찾아갔다. 명상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나가 완성되고 나니, 수납장을 둘 공간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빨래, 걸레질, 분리수거까지 집안일이 레고 블록처럼 연결되고 확장되었다. 그리고 가구와 조명도 재배치했다. 아무리 크고 무거운 가구라도 무게중심과 마찰력을 잘 활용하면 혼자서도 충분히 이동시킬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집안일은 창의적인 스포츠이다. 산책이 좋은 이유는 낯선 환경을 접하며 분위기 환기를 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가구나 조명의 이동만으로 집안에서도 낯선 환경을 연출해서 산책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집안일은 새로운 산책길을 내는 것이다.






어디선가 방 정리 상태가 머릿속의 무의식 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머릿속이 복잡하다면 청소를 하자. 창문을 활짝 열고 쾌청한 공기와 하이파이브를 하자. 집 자체도 분명 호흡을 할 것이다. 정리를 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 비울수록 마음이 평온해지고, 내 집 평수가 커진다는 것을.



부정적인 생각을 뒤집어 긍정적인 생각으로 재배치하고, 일어나지도 않을 불안이나 걱정, 욕심을 버려 마음의 평수를 키우면 우리는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 가끔씩 도망치고 싶을 때 무의식적으로 옷장같이 어두운 곳으로 숨고 싶을 때가 있다. 아마도 가장 평온했던 어머니의 양수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작은 올챙이 시절, 어머니의 양수는 하나의 우주처럼 컸으리라. 비울수록 평온하다. 집은 비우는 데 한계가 있겠지만 마음은 왠지 공(空)이 될 때까지 비울 수 있을 것 같다.



내 술버릇 중 하나는 술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 집 정리를 하고 자는 것이다. 아니, 일부러 습관을 들였다. 술 마실 때는 안주를 많이 먹게 되어 그냥 자면 부대낀다. 그렇다고 취한 와중에 운동을 하기도 그래서 가벼운 산책 같은 기분으로 집 청소를 한다. 한번은 완전만취 상태로 들어와서 거의 대청소 수준으로 집안 정리에 가구 배치까지 바꾸고 잠들었는데, 다음날 ‘우렁각시’가 집을 청소해 준 줄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우렁각시’가 아니라 ‘우렁나’였다. 아무튼 숙취가 있더라도 다음날 잘 정돈된 집을 보면 새 하루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


집에서 영화 보며 캔맥주라도 마신 날에는 꼭 정리를 하고 맥주캔까지 분리수거하고 잔다. 전날 술 마셨던 잔상을 남기기 싫어서이다. 아침에 찌그러진 캔이 보이면 내 무의식이 ‘아! 어제 나 술 마셨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갑작스럽게 숙취 모드가 발동될 수도 있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다. 물론 안 좋은 기억들을 떨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런 트라우마나 흔적들도 잘 정리해두면 안전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집안일은 운동이다. 몸도, 머리도 많이 쓰게 되고 몰입도 하게 되어 자립하고 확장하고 성장할 수 있는 근력을 키워준다. 집안일은 음악이다. 집안일을 하는 동안 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된다. 모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다. 나는 지휘자이자 단원으로서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없이 오롯이 나만의 심포니를 만들어간다. 음표들을 시간 위에 차곡차곡 쌓기 위해서는 음표들이 제자리에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한다. 연주를 하다 지치면 악보에 쉼표 대신 고소한 커피를 그려 넣는다. 내 안의 나와 만나는 성찰의 시간을 통해 한 악장, 한 악장 만들어 가다 보면 새로운 공간이 완성되고 정리의 리듬감이 생긴다. 리듬감은 삶의 활력을 준다. 집안일을 잘하면 음악도 잘하게 될 것 같다.





집안일은 아름다운 도피처이기도 하다. 시험이나 마감 날짜가 다가오면 청소나 집안일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집안일은 미노타우로스가 사는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실마리이다. 뭔가 해답이 보이지 않고 마음이 답답할 때 체스를 두듯 집안일을 시작하자. 집안일은 움직이는 명상이다.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바로가기 https://m.hani.co.kr/arti/opinion/column/1111312.html#ace04ou


10/9(월) 한겨레 신문 지면과 웹 오피니언 면에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집안일은 명상이다‘ 편이

이상면의 삽화와 함께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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