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생 미국 시인 메리 루플(Mary Ruefle)의 산문집이다. 루플은 한때 루이스 글릭이 있었던 버몬트 계관시인 자리를 재작년에 물려받았고, 지난해 퓰리처상 시 부문 결선 후보에 올랐으며, 내가 경애하는 독서광들과 작가들이 열렬한 사랑을 표해온 인물이다. 《나의 사유 재산》에 실린 41개의 글들은 조금씩 이상하거나 황홀하거나 울적한 모양새로 제각기 아찔하고, 아름답다. 폐경을 다룬 에세이 〈멈춤〉부터 슈렁큰 헤드(쪼그라든 머리)에 관한 이야기인 〈나의 사유 재산〉까지, 짧은 수록작들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시인의 산문에 끔뻑 죽는 이유를 새삼 깨닫게 된다.
산문이란 운문이 아닌 글을 뜻한다.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쓴 글이면 산문이다. 소설, 에세이, 산문시, 비평문 등 대부분이 산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산문집’이란 우리가 흔히 일컫는 에세이집과도 다른 개념이다. 분류상 더 상위 개념일 수 있고, 부분집합을 갖는 개념일 수도 있다. 《나의 사유 재산》이 딱 그렇다. 누군가는 이 책을 시집이라 할 것이고, 초단편소설집이라 불러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실제로 저자인 메리 루플은 이 밀도 높은 글들 중 어떤 것은 에세이일 것이고 어떤 건 산문시라 볼 수 있을 거라고, 다만 본인은 모든 글을 산문이라 생각하고 썼을 뿐이라고 말했다.
추천사를 써주신 김소연 시인도 어느 지면에선가 자신의 ‘산문을 쓰는 태도’와 ‘시를 쓰는 태도’가 서로 다르다고 얘기한 바 있다. 산문과 시를 전혀 다른 것으로 본다는 점에선 메리 루플도 비슷하다. 물론 좋아하는 시인이 쓴 각기 다른 글들을 읽는 우리의 태도가 그처럼 다르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이에 대해선 루플이 〈파리스 리뷰〉와 가진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대강 간추려보면 좋을 것 같아 아래에 붙여본다. 인터뷰어는 메리 루플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껏 산문집을 단 두 권만 발표했습니다. 당신에게 산문을 쓰는 일과 시를 쓰는 일은 많이 다른 일인가요?”
메리 루플: 음, 항상 달라요. 시를 쓸 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고, 그렇게 쓰인 시는 어떤 의도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시에 담긴 의미를 내가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면, 아마도 60페이지는 족히 걸릴 거예요. 반면 산문을 쓸 때는 주제와 아이디어, 그리고 내가 쓰고 싶은 경험을 기록해둔 글들을 펼쳐 봅니다. 내가 쓴 산문이 어디로 갈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늘 어떠한 상황이나 사물에 기초하고 있죠. 나의 산문은 각각 다른 리듬을 갖고 있고, 머릿속에선 우측 정렬로 쓰여집니다. 또한 산문은 내게 일종의 공적 언어이고, 시는 사적인 언어에 가깝다는 점도 둘의 차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시는 내 안에 존재하는 삶입니다. 취하거나, 아니면 남겨두면 되는 거지요. 나는 내 시를 읽는 독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아요. 다른 이들의 반응이 내 안의 삶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으니까요. 그에 비해 산문은 훨씬 더 신경이 쓰입니다. 산문은 외부에 더욱 열려 있고, 서로 주고받는 관계에 있기도 하지요. 산문을 쓸 때의 나는 불안에 떠는 난파선이에요. 시를 쓸 때는 조금도 그렇지 않죠. 시를 쓸 때면 누군가가 그 시를 읽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아요. 시를 쓰는 나는, 오직 나 자신을 위해, 죽은 자들을 위해, 그리고 신을 위해, 즉 존재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쓰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