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엔터테인먼트 다큐멘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내러티브 다큐멘터리’의 시대가 당도한 지 오래다. 특히 지난 몇 년간 넷플릭스, 훌루, 아마존 프라임 등의 OTT 서비스는 양질의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왔고, 항상 예정작 소식이 끊이질 않는다. ‘논픽션 필름’이라고도 불리는 이 장르는, 강력한 스토리텔링과 세련된 연출로 논픽션물을 좋아하는 나 같은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당장 떠오르는 훌륭한 넷플릭스 오리지널만 해도 <아만다 녹스>, <천사들의 증언>, <이블 지니어스: 누가 피자맨을 죽였나?>, <고양이는 건드리지 마라>, <그는 야구장에 갔다>, <아메리칸 머더>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범죄를 소재로 한 엔터테인먼트 다큐지만, 꼭 심각한 범죄 분야가 아니어도 모큐멘터리 <아메리칸 반달리즘>, 진지한데 웃기는 <코카인 섬의 전설>, 감동적인 <나의 문어 선생님>과 같이 색다르고 흥미진진한 다큐들도 찾아보면 은근히 많다.
전통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는 유럽에서 인기가 많은 장르였다. 심지어 유럽에선 TV 다큐멘터리의 만듦새가 너무 좋아 사람들이 극장에 잘 가지 않는 현상까지 벌어지곤 했다는데, 물론 이는 옛날얘기고 이젠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사람들이 좋아하면 돈이 되고 돈이 되면 제작사가 돈을 들이니 결국 실력 있는 창작자와 잘 만든 작품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사실 내러티브 다큐멘터리라는 게 근래에 새롭게 생겨난 특별한 장르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흔히 보아온 (자연이나 역사를 다루는) 이른바 교양 다큐멘터리와는 전혀 다른, 철저히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다큐멘터리가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 덕에 다양한 시청자와 지속적으로 만날 기회를 잡게 되면서 더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다큐멘터리의 이 같은 인기는, 책으로 치자면 ‘내러티브 논픽션’ 혹은 ‘리터러리 논픽션’의 인기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미국에선 1960-1970년대부터 소설적 장치를 빌려 온 논픽션 작품들이 일반 독자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스토링텔링 기법을 논픽션에 녹여냄으로써 건조한 사실 전달을 넘어 독자의 흥미를 끌 내러티브로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법이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특히 미국에서는, 스토리를 중시하는 내러티브 논픽션 장르가 완전한 주류로 정착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가 되었다. 이른바 논픽션 문학이, 소설과 시라는 고전적 장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기엔 무리지만 그럼에도 50여 년밖에 안 되는 역사를 가진 이 새로운 스타일의 문학 장르가 여전히 성장 중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많은 미국 독자들이 범죄 실화(true crime)에 열광한다는 점은 내러티브 논픽션 시장의 부흥에 핵심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어째서 미국 사람들이 범죄 실화에 그토록 환장하는지는 (그저 사회문화적 배경 때문이리라 뭉뚱그려 추측만 할 뿐) 정확히 모르겠지만, 범죄 실화 장르는 트루먼 커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부터 에릭 라슨의 <화이트 시티>까지 지난 수십 년간 적잖은 베스트셀러를 탄생시키며 내러티브 논픽션 장르의 인기를 이끌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엔터테인먼트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분야는 여전히, 역시나, 범죄/스릴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크라임 씬: 세실 호텔 실종 사건>은 ‘잘 만든 엔터테인먼트 다큐멘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다시 한 번 던지게 한다. 차별화된 연출력이 중요한 내러티브 다큐멘터리 장르에선 당연히 감독이 누구냐에 시선이 가는데, 에미상을 받은 적이 있는 조 벌린저는 90년대부터 다큐 영화를 찍어온 베테랑이다. 벌린저는 2019년 넷플릭스를 통해 여성 대상 연쇄살인마 테드 번디에 관한 다큐와 극영화를 발표했고, 이 끔찍한 소재의 완성도 높은 두 영화가 성공하면서 <크라임 씬> 시리즈 제작으로 이어진 듯하다. <크라임 씬: 세실 호텔 실종 사건>에 호평이 쏟아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내러티브 다큐멘터리 장르의 가능성, 즉 확장성과 창의성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호텔, 저택, 박물관 등 실내에서 벌어지는 ‘유령의 집 이야기(a haunted house story)’는 그 자체로 하나의 매력적인 장르인 데다, 인터넷 시대의 사이버 불리(cyber bully)에 관해 직설적인 성찰을 보여준다는 것도 장점이다. 무엇보다 이 다큐멘터리는, 다시 책에 비유하자면, 아주 흡입력 강한 내러티브 논픽션이자 메모아(memoir)라고 할 수 있다. 제작진은 객관성을 표방한 외부자의 시선으로 등장인물을 대상화하지 않고,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피해자 엘리사 램을 적극적인 화자의 위치로 끌어올려 보는 이로 하여금 그의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한다. 조 벌린저는 얼마 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작품을 다루는 팟캐스트 [You Can’t Make This Up]에 출연해, <크라임 씬>을 통해 무엇보다도 “입체적인 인간(three dimensional human being)”으로서의 엘리사 램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크라임 씬>은 어쩌면 내러티브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까지 할 명작으로 남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 장르의 더 잘 만든 영화를 계속해서 보고 싶고, 이에 관한 담론이 전무한 국내에서 관련 비평이나 이야기도 접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