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슬픔이다

치매 아닌 담도암

by 윤꿀

엄마의 사망 진단서에는

등록번호, 성명, 성별, 주소, 발병 일시, 사망일시, 사망 장소, 사망 원인, 사망의 종류 등이 정해진 양식에 따라 기록되어 있었다.

발병 일시: 미상, 사망의 원인: 담도암, 사망의 종류: 병사.


엄마는 한평생 아빠 때문에 몹시도 애를 먹었다. '애를 먹었다.' 나는 과연 이 표현이 정확한지 모르겠으나, 엄마는 때때로 이 말을 했다. 아빠는 화가 나면 엄마를 때렸다. 그 말은 참 슬픈 말이다 "아주머니, 죄송한데 아빠가 엄마를 때려서요. 좀 말려주세요" 나는 한밤 중 옆집 아주머니를 데리고 오는 역할을 했다. 그건 참 슬픈 역할이다.


어린 내 기억 속에 엄마는 이상하게도 몹시 씩씩했다. 엄마는 이해불가하게 긍정적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폭력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괜찮아질 것이라 믿었다. 엄마는 매일 담배를 피우며, 늘 취해 인사불성 되는 아빠보다 훨씬 더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라 믿었다. 의심 없이. 그 믿음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기에 엄마의 걱정은 폭력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치매였다. 폭력에 오랜 시간 노출된 탓인지 아니면 매일 긴장의 연속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엄마는 긴장하면 한쪽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엄마는 그것이 치매 초기 증상이 아닐까 걱정하셨다. 엄마는 그렇게 늘 치매를 걱정하셨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폭력에 익숙해졌다. 어린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냥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삶은 계속됐고. 우리는 성인이 되었다. 딸 셋. 언니들이 차례로 결혼을 하고 막내딸인 나도 결혼을 했다.

집에는 엄마와 아빠 단둘 만이 남았다. 다행히도 엄마의 생각대로 아빠는 조금씩 괜찮아졌다. 딸 셋은 집에 혼자 남은 엄마 걱정에 아빠 눈치를 봤다. 우리는 친정집을 자주 찾아갔다. 밥을 사드리고. 용돈을 드리고. 아빠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우리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하는 동안 엄마는 노년에는 이빨 빠진 호랭이 같을 아빠를 벗어나 여행도 다니며 자잘한 것 하나하나까지 본인 마음대로 할 거라면 신나 하셨다. 그런 평범한 꿈을 꿈꾸셨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나는 일을 하던 중간에 배가 아프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애가 들어서는 것처럼 배앓이를 한다고. 평소 아프다고 하지 않은 엄마가 그렇게 표현할 정도이면 이상하다 생각했어야 했는데. "엄마 아프면 병원에 빨리 가봐" 나는 말했다. "작년인가? 위, 대장내시경 둘 다 이상 없었다고 하지 않았어?" 하고 되물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일이 주말이니 월요일 가보겠다는 엄마 말에 "알겠어" 대답했다. 퇴근을 하고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하원시켜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월요일 병원 꼭 가봐"


아마 한 달 전쯤부터 전에 없던 갑작스러운 복통 시작 되지 않았을까.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체한 건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참고 견뎠을 것이다. 그러다 참을 수 없는 복통을. 아니면 뭔가 아무래도 몹시 이상하다고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그래서 나에게 전화를 했을 것이다. 담도암 4기. 병명이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에게 내 말이 많이 서운하진 않았을까. 나는 마음이 아프다. "엄마, 바로 응급실 가봐" 그 말을 왜 못했을까.


월요일 아침. 엄마의 눈에 황달 증상이 나타났다. 의사는 큰 대학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다는 소견서를 써주셨다. 엄마는 초기에는 대부분 무증상, 황달 증상이 나타나면 이미 대부분 말기에 해당되는 담도암이었다. 질병분류코드 C24.9 담도암. 담도암 4기.


정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치매 증상일까 걱정하셨던 엄마의 손떨림은 '어떤 병' 보다는 긴장하면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치매보다는 엄마의 암 진단을 걱정했다. 건강검진으로 위내시경,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았는지 확인했고, 혈액검사 결과지를 훑어보면서 이상수치를 확인했다. 갑상선, 유방, 자궁 관련 검사를 권유했다. 이해불가하게 긍정적이었던 엄마는 암이더라도. 예후가 좋지 않은 췌장암이나 담도암 같은 그런 암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진 세상에서 치료를 받고 이겨낼 수 있는 그런 암이면 안 되었나.


부산에서 수술이 힘들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서울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이란 선택을 후회할지 몰라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수술이라도 해줄걸' 하는 후회와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수술과 항암 · 방사선 치료, 암 요양병원. 그러나 곧 대학병원 주치의는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을 권유했다. 엄마는 왜 그래야 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게 되면 엄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우리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손자, 손녀들에게 웃어주셨다. 엄마는 내가 결혼 전 퇴근길에 종종 사갔던 햄버거나, 피자가 먹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예전처럼 나누어 먹었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호스피스 병동이라는 걸. 어느 날 "엄마, 내일 또 올게" 하고 간 다음날이었다. 거짓말처럼 엄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눈도 뜨지 못한 채 누워만 계셨다. 그런 날을 이삼일 더 보내고 난 후, 엄마는 새벽녘에 돌아가셨다.


치매를 늘 걱정하셨던 엄마는 그렇게 만 63세의 나이에 담도암으로 아빠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요즘 세상 그리 많지도 않은 나이. 이제 딱 편해질 나이. 치매가 아닌 담도암으로 말이다.


"엄마! 나만 데리고 도망가자. 언니들까지 다 데리고 가면 엄마 힘드니깐, 나만 데리고 도망가서 살자" 어렸을 때, 내가 엄마한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시절 아빠의 눈빛을 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이혼'이 아닌 '도망'이라는 말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도망치지 않았다. 엄마가 <나만>이라고 말하던 나처럼 그렇게 조금이라도 이기적인 생각으로 살았다면 담도암이 아니었을까?


지나고 보니 왜 이렇게 바보 같았을까. 이렇게 갑자기 악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갑자기가 아닌 건데. '이제 마음에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줄 알았다. 그런 말을 듣기 전까지는 뭔가 계속되는 줄 알았다. 시간이 더 있을 줄 알았다. 잘 걷던 엄마가 걷는 게 불편해지고, 누워계시다가, 누워만 계시고, 점점 말하기도 어려워 대화가 끊기다가, 나중에는 아무 말씀을 못하는. 눈도 채 뜨지 못하는 순간까지 그렇게 병세는 느리진 않지만, 순차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한스럽다는 말이 이런 마음이구나 뼈저리게 느낀다.


엄마! 시간을 다 못 돌려도 단 하루만이라도! 아주 멀리도 아니고. 호스피스 병동에서 엄마랑 도란도란 다시 이야기 나눌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간절한 생각을 한다. 나는 말기암 엄마에게 슬픔을 표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우는 내 모습을 보면 몹시도 가슴 아플 거라 생각했다. 밝은 척. 나는 슬픔이 새워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뭣하러 그랬을까. 후회가 된다. 나에게 엄마는 슬픔이다.


왜 엄마의 걱정은 치매였을까? 건강을 자신했던 엄마는 아빠 치다꺼리를 다하고 홀로 남은 당신이 치매라도 걸리면. 내 정신이 아닌 상태로 내 의지가 아닌 상태로 내 마음이 아닌 상태로 자식들 고생시킬까 봐. 아마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모든 대부분의 엄마들이 치매를 걱정하는 마음은 그럴 것이다. 나는 엄마의 고생의 끝을 보고 싶었다. 엄마의 꿈처럼. 엄마와 친구처럼 전화하고 여행하고 그런 삶을 소망했다. 그 끝이 담도암 . 병사. 그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 자식 생각에 늘 치매를 걱정하던 엄마, 그런 엄마의 딸로 살아서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하면 살아간다.


"엄마 아니었다면 지금의 난 없었을 거예요.

그런 아빠 옆에서 딸 셋. 우리를 키워 내느라 너무나 애쓰셨어요. 고생만 해서 너무 미안해요. 감사해요.

거기서는 편안했으면 좋겠어요.

다음 생은 다정한 남편에게 사랑받으며 한평생 행복하게 사는 삶이면 좋겠어요.

기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