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번호, 성명, 성별, 주소, 발병 일시, 사망일시, 사망 장소, 사망의 원인, 사망의 종류 등이 규정된 양식에 맞춰 기록되어 있었다.
발병 일시: 미상, 사망의 원인: 담도암, 사망의 종류: 병사.
엄마는 한평생 애를 먹였던,이렇게 표현해도 될까? 싶을 정도의가정폭력에 있었다. 엄마는 온종일 줄담배를 피우며 매일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는 아빠보다는 훨씬 더 건강하게 오래 살것이라 확신했다. 그 믿음은 너무도 당연했기에 다만 걱정되는 것이 치매. 폭력에 오랫동안 노출되었던 탓인지 긴장되면 한쪽 손이 미세하게 떨렸던 걸 치매 증상인가 싶어 걱정하셨다. 엄마는 그렇게 늘 치매를 걱정하셨다.
우리는 폭력에 익숙해졌고, 싸움을 말리고, 어질러진 집을 정리하고, 그렇게 자랐다. 언니들이 결혼을 하고 막내딸이었던 나도 결혼을 하면서 집에는 엄마와 아빠 단둘 만이 남았다. 우리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하는 동안 엄마는 노년에는 이빨빠진 호랑이 같은 아빠를 벗어나 여행도 다니며 자잘한 것 하나까지본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평범한 삶을 꿈꾸셨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일을 하다가 배가 아프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애가 들어서는 것처럼 배앓이를 한다고. 엄마가 전화를 걸어와 아프다 말할 정도이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했어야 했는데. 나는 병원에 가보라고 복부 초음파 검사를 받아보라고 내일이 주말이니 월요일 가보겠다는 엄마 말에 "알았어"라고만 대답했다.
월요일. 엄마는 전에 없던 황달 증상이 나타났고, 의사는 바로 초음파 검사를 했다. 그리고 큰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다고 소견서를 써주셨다. 엄마는 초기에는 대부분 무증상이며, 황달 증상이 나타나면 말기에 해당되는 담도암이었다.
소견서을 읽어보고 또 읽어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정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부모님의 암 진단을 생각 못해 본 것은 아니었다. 큰언니는 간호사이고, 나 또한 병원에서 근무를 한다. 매번 건강검진으로 위내시경, 대장내시경 받았는지 물어보았다. 치매 증상일까 걱정하셨던 손떨림도 걱정이 되면서도 '어떤 병' 보다는긴장하면 나타나는 증상이라고만 생각했다. 진료를 받아야 한다면 어느 진료과로 접수를 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했었다. 매년 받으시는 건강검진에 복부 초음파도 포함되어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예후가 좋은,좋아진 세상에서 치료를 받고 이겨낼 수 있는 그런 암이면 안 되는 거였을까? 하늘도 무심하다는 말이. 이런 마음인가 보다.
부산에서는 수술이 힘들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서울로 올라가 수술을 받았다. 수술이란 선택을 나중에 후회할지 몰라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수술과 항암 · 방사선 치료 그리고 암 전문 요양병원의 고주파 치료. 그럼에도 엄마는 담도암 진단 10개월 후쯤 결국에는 주치의 권유로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을 했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신 후에도 우리와 줄곧 이야기 나누고 스스로 이동도 하셨던 분이셨는데. 어느 날 "내일 올게" 하고 간 다음날 거짓말처럼 엄마는 아무 말씀도, 눈도 뜨지 못하고 누워만 계셨다. 그런 날이 2~3일 더 지나 엄마는 새벽녘에 돌아가셨다.
그렇게치매를 늘 걱정하셨던 엄마는만 63세의 나이에담도암으로 아빠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요즘 세상 그리 많지도 않은 나이. 이제 딱 편해질 나이. 치매가 아닌 담도암으로 말이다.
"엄마랑 나랑만 도망가자. 언니들까지 데리고 가면 엄마가 너무 힘드니깐, 엄마랑 나랑만 도망가서 살자" 어렸을 때, 내가 엄마한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요즘에는 '아이들 때문에 이혼하지 않는다'는 말이 한심한 말이 되어버린 듯 하지만, 그 시절 아빠의 눈빛을 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이혼'이 아닌 '도망' 이라는 말을 선택 했을 것이다. 어린 내가 그랬듯이. 잘 도망쳐도 쉽지 않은, 찾아내면 큰 사단이 날 것 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엄마는 도망치지 않았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이기적인 생각으로 살았으면 담도암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을까?
엄마! 아빠 눈치 안보게 고주파 치료 한번 더 해주고 싶은 마음에 일 그만 둘 생각을 못 했어. 어린이집에 제일 오래 있는 아직 어린아이 때문에 엄마 병실에서 자고 갈 생각 한번 못한 내가 참 못났구나 싶어. 엄마가 참 서운했겠다. 나대로는 살뜰히 챙긴다고 챙겼는데 그래도 어린 내 자식이 먼저였나. 급성기 병원에서 수술하고 이럴때 말고, 오히려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긴 후에는 왔다 갔다만 하고 하루 자고 갈 생각을 못했어. 시간이 더 있을 줄 알았어. 곧 그렇게 해야지 했어. 이렇게 갑자기 악화될 것이라고 왜 생각을 못했을까? 병원에 다니고 있어도 왜 이렇게 바보 같았을까. 갑자기가 아닌 건데. '이제 마음에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줄 알았어. 한스럽다는 말이 정말이지 이런 마음이구나 뼈저리게 느껴.
엄마! 시간을 다 못 돌려도 단 하루만이라도!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그 호스피스 병동에서 엄마랑 밤새 이야기 나눌 수 있었으면 하는 그 간절한 생각. 운 거 티 날까 봐. 엄마 뭐 했어? 아픈 건 어때? 식사는 쫌 하셨어? 먹고 싶은 거 없어? 뭐 사다 줄까? 이런 말만 한 것 같아."엄마 속상한 거 다 잊고 걱정하지 마. 우리 잘 살게. 엄마 아니었으면 지금의 난 없었을 거야. 정말 감사해. 고생만 해서 너무나 미안해. 너무나 사랑해"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기암,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엄마를 두고서도 미루어 두었던 말들.이제 곧 말할 때가 오겠지 그런 생각만 했어. 엄마가 온전한 정신이었을 때 했어야 했는데. 제일 마지막에 해서 정말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