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기록, 교사의 성장
한 장의 편지가 만든 변화
우리 집 냉장고에는 종이 한 장이 붙어 있다. 딸아이 담임 선생님이 학기 초에 보내주신 편지다. A4 용지에 인쇄된 특별할 것 없는 한 장의 편지지만, 우리 가족에겐 소중한 안내서가 되었다. 편지에는 아이가 아파서 등원하지 못할 경우 담임 선생님께 문자로 알려달라는 당부, 약을 먹여야 할 경우에는 투약 의뢰서를 작성한 뒤 문자로 알려달라는 구체적인 안내가 담겨 있다. 그 한 장의 편지는 학부모인 나와 딸아이의 담임 선생님 사이를 잇는 중요한 소통의 매개체가 되었다. 나 역시 매년 학기 초, 학부모님께 편지를 쓴다. 편지에는 우리 반의 규칙과 운영 방침, 그리고 내가 품고 있는 교육 철학을 담는다. 언제부턴가 마음을 담은 이 편지를 꼭 보내기 시작했는데,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예전보다 학부모 민원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다. 아마도 편지를 통해 나라는 사람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생겼기 때문이리라.
이전에 학부모 편지를 보내기 전에는 학부모 총회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초등학교에서는 보통 1년에 한 번 학부모 총회가 열린다. 담임 교사가 1년 동안의 학급 운영 방안을 안내하고, 학부모회 임원을 선출하는 자리다. 나는 이 자리에서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고, 학급을 어떻게 이끌지 정성껏 전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노력이 오래가지 않았다. 총회에서 나눈 말은 금세 잊히고 말았다. 말은 기록으로 남지 않기에 소멸되기 쉬운 것이다.
기록은 다르다. 문서화된 학급 안내는 학부모님들이 수시로 꺼내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 반 규칙을 안내한 글 덕분에 학부모님들도 규칙을 잘 지켜주셨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새 학기 첫날, 내가 아무리 공들여 말로 설명해도 아이들의 머릿속엔 오래 남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우리 반 규칙을 정리해 학급 게시판에 붙여두기 시작했다. 그렇게 글로 남긴 규칙은 아이들의 일상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교실 속 순간들을 기억하는 법
기록은 단지 규칙을 안내할 때만 힘을 발휘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교실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수많은 순간을 함께 보낸다. 체육대회에서의 우승, 수학여행에서의 환한 웃음, 요리 실습에서의 분주한 손길들… 수많은 순간들이 스쳐간다. 하지만 그 특별했던 장면들이 모두 가슴속에 남아 있지는 않다. 나 역시 10년 넘게 아이들과 살아왔지만,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장면은 몇 되지 않는다. 그 장면들은 하나같이 글로 남겨두었던 순간들이다.
글을 쓴다는 건, 그 경험을 반복해서 복기하는 과정이다. 그때 내가 했던 말, 아이들의 표정, 분위기, 느낌까지 되살리며 글을 써내려간다. 그렇게 정성 들여 쓴 글은, 그리고 그 경험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기록은 거창할 필요도 없다. 완벽한 문장을 갖추지 않아도 괜찮다. 짧은 문장, 때로는 단어 몇 개만으로도 충분하다. 중요한 건 ‘남기려는 마음’이다. 블로그, 브런치, SNS 같은 공간도 훌륭한 기록의 장소가 될 수 있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도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교사의 기록, 교사의 성장
교사는 해마다 비슷한 일을 반복한다. 만나는 아이들은 달라지지만, 한 학기가 돌아가는 방식과 수업의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무심코 익숙함에 젖어, 관성대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고 나면 ‘내가 성장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이럴 때 기록은 좋은 나침반이 되어준다. 기록을 통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교사의 기록은 곧 교사의 성장기록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록은 교사의 발자취이자, 성장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경험하고 쓰는 일은 교사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배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배우지 않는 사람은 가르칠 수 없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배우는 것은 교과 내용뿐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 변화하려는 자세다. 교사인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록은 스스로의 성장을 증명하는 자산이 된다. 10년 차, 20년 차가 되었을 때, 우리 내면은 분명 더 깊어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 내면의 성장만으로는 부족하다. 외부에 드러나는 결과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10년 후, 20년 후 우리는 묻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그때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증거를 기록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