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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Feb 15. 2020

임산부가 되다.

[임신한 직장인은 워킹맘이 되나요, 전업맘이 되나요?]


 임신테스트기에 선명한 줄이 떴을 때, 사실은 당황스러웠다.

 계획 임신이었다. 결혼 후 한동안은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게 무서웠지만 몇 달 전 이제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여유자금도 있었고, 이사도 해서 주거지도 안정된 상태였다. 하반기보다는 상반기 출산을 하고 싶었기에 연말쯤에는 임신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시기보다 한 달이 빨랐다. 그때의 나는 겨우 입사 한 달 차였다.


 입사 제의를 받고 간 회사였고, 나는 연봉을 물어보기 전에 육아휴직이 보장되냐는 질문을 가장 먼저 했다. 내년 초 임신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부장님은 3개월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3개월이라면 입사하지 않겠다고 했다. 부장님은 6개월을 약속했다.


 많은 사람이 생각보다 임신이 쉽게 되지 않는다고 했다. 임신을 하려고 시도하다가 몇 년간 임신을 못 하는 경우도 있다고들 했다. 내 몸이 약한 편이기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피임하지 않은 첫 달, 그렇게 테스트기에 선명한 빨간 줄이 떴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한참을 임신 초기 증상과 병원 방문 시기를 검색해보다 남편을 불렀다. 남편은 환하게 웃었다.


 생리 주기에 따르면 아마도 아기는 4주, 한 주 기다렸다가 산부인과를 방문하기로 했다. 임신주수를 수정한 날부터가 아니라 마지막 생리일로부터 정한다는 게 신기했다. 4주라고 해도 수정된 지는 2주밖에 안되었을 수도 있다.

 요즘 내가 유독 못생겨 보이고, 배가 나온 것 같아 우울했는데 임신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모든 게 달라져 보였다. 병원에 가기까지 일주일은 너무 길었다. 아이가 갑자기 사라져버릴까 봐 무섭기도 했고, 산부인과에 가서 임신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무섭기도 했다. 계속 감기 같은 증상이 있고, 미열이 있었다. 그런 평소와 다른 증상이 있음에 감사했다. 그 불편한 증상이 아이가 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산부인과 방문 D-1


 채용 검진을 하기로 했다. 입사 제의를 받고 일주일 만에 입사를 했고 입사한 후로 일이 몰아쳤던 터라 이제야 채용 검진을 하게 되었다. 사실 채용 검진을 해야 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입사 2주가 지난 뒤에야 부장님이 채용 검진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작은 회사의 일이란 이런 식이다.

 큰 프로젝트가 끝나고 겨우 한가해졌을 무렵, 채용 검진을 하러 갔다. 산부인과를 다녀오지 못해 회사에는 아직 알리지 못한 상태였다.

 건강검진을 할 때 임산부는 주의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터라 확인해보니 엑스레이를 찍을 때 방사선이 나와서 초기 임산부에게 영향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검진 담당자에게 문의해보니 배를 가리고 찍거나 찍지 않기를 권유했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부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임신한 것 같은데, 혹시 엑스레이 안 찍어도 될까요? 아직 병원을 못 가서 미리 말씀 못 드렸어요.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내년에 임신 계획 있다며, 왜 이렇게 빨리 임신했어?”

 이상하다, 임신은 축복이라던데…? 이런 말을 들어야 할 줄은 몰랐는데….

 “…엑스레이 꼭 찍어야 된다면 배 가리고 찍을게요.”

 “아니에요, 혹시 모르니까 안 찍어도 돼요. 서류에 남는데 큰일이네.”

 아가, 이런 말을 듣게 해서 미안해.


산부인과 첫 방문


 “여기 아기집이 보이네요.”

 혹시나 임신이 아닐까 봐 걱정되었는데,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초음파 사진 속에 아기집은 까만 점처럼 콕 박혀있었다. 아기는 아직 보이질 않았다.

 다행히 그 주 주말에 시부모님을 만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부모님에게 초음파 사진을 내밀자, 아버님은 나를 꽉 안아주셨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내심 기다리셨으리라. 두 분은 연신 고맙다고 하시며 몸조심하기를 당부하셨다. 내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았다.


 다음번 병원 방문은 2주 뒤, 시간이 참 더디게 갔다. 임신 전과 달라진 것은 많이 없었다. 나는 그냥 여전히 나였고, 여전히 회사에서 일했다. 몸 상태가 크게 달라진 게 없었고, 일상생활에 무리가 없었다. 처음 병원에 다녀왔던 날 보건소에 들러 산전검사를 하며 임산부 배지를 받아왔지만, 가방에 달지 않았다. 15분 정도 버스를 타니 잠시 서 있는 것도 참을만했고, 배지를 다는 게 왠지 자리를 비키라는 표시같이 느껴져서 민망하기도 했다. 하루하루는 변함없이 흘렀다.


 6주, 심장소리 듣던 날


 초음파를 하려고 의자에 앉는데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심장이 안 뛰면 어떻게하지? 잠시 후, 의사는 남편을 들어오게 한 뒤, 난황과 아기가 잘 보인다며 초음파를 보여주었고, 심장 뛰는 모습을 보여준 뒤 심장소리를 들려주었다.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아기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초음파 속 아기는 아직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데, 그 작은 아기의 심장이 힘차게 뛰고 있었다. 대견하고, 고맙고, 또 감사하다는 생각이 흘러갔다. 잘  있는지 궁금했던 아이가잘 있다고 응답해주던 순간,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서 불만이 생길 때 이 감정을 기억하세요. 공부 못한다고 뭐라 하지 말고.”

 의사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 순간을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도서관에서 육아 관련 책을 잔뜩 빌려왔다.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도 너무 없었다. 무서웠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 아르바이트나 대외활동 등을 하며 직간접적으로 사회 경험을 하고 직장에 입사했던 반면, 아무런 준비 없이 임신, 출산, 육아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많은 사람이 하기에 나도 할 수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무언가 대비가 필요했다.


 “오빠도 아기를 사랑해?”

 어느 날이었던가, 잠자리에서 남편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그 말에 한참을 울었고 남편은 당황해했다. 나는 아이와 항상 함께 있으니 아이를 생각할 시간이 많지만, 남편은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임신은 내가 했으니 남편은 어떤 변화를 느낄 것도 없었고 임신 후에도 남편은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내 아이는 축복받으며 태어나길 바랐는데 남편의 대답에 정말 축복받고 사랑받는 것 같았다. 정리되지 않는 내 말에 남편은 당연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 아들을 원했던 집의 셋째딸이란 위치는 필연적으로 그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나는 축복받으며 태어나지 못했다는 아픔, 어쩌면-아버지의 선택에 따라-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외로움, 딸로 태어난 게 내 잘못일지도 모른다는 괴로움이 유년 시절 가득했다. 그래서 내 아이만은 축복받으며 태어나서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기를 바랐다.


 “예산이 부족해서 대체 인력은 못 쓸 것 같은데.”

 일 년 예산을 짜던 중, 부장님이 말했다.

 “대신 알바로 쓰고, 연말이 바쁘니까 그때는 자기가 가끔 나와주면 되겠다.”

 연말에는 아기가 3~4개월일 시기였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참을 수가 없어서 말했다.

 “곤란하시면 권고사직해주세요. 실업급여라도 받게요.”

 그날 남편이 회사로 나를 데리러 왔고, 나는 남편에게서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하다 펑펑 울었다.

 “육아휴직이 6개월인 것도 서러운데,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해? 더 싫은 건 그런 말을 듣는데 이 회사가 아니면 다시 취직을 못할까 봐 다녀야 하는 내가 너무 싫어. 능력 없는 내가 싫어.”

 남편은 그만두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게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 그때는 그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왼) 4주 초음파 사진 (오) 6주 초음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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