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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Feb 19. 2020

임산부가 되니 보이는 것들

임산부 뱃지, 불편함과 편함 사이

 임신 사실을 산부인과에서 확인했을 때 바로 보건소에 가서 임산부 뱃지를 받아왔지만, 한달 간은 쓰지 않았다. 임산부라고 하지만 몸이 많이 불편한 것도 없었고, 뱃지가 괜히 민망했다. 임산부입니다, 자리 비키세요, 하는 느낌?
 그러다 8주쯤부터 몸이 점점 힘들어지자 뱃지를 했다. 백팩 안쪽-등과 가방이 만나는 면-에 뱃지를 해서 가방을 벗지 않으면 뱃지는 보이지 않는다. 버스를 타는 시간보다 걸어 다니는 시간이 많은데 그때까지 굳이 내가 임산부라는 정보를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하고 싶지 않았다.
 백팩을 손에 들고 타거나 해도 뱃지는 잘 보이지 않는지 아무도 자리를 비켜준 적은 없었다. 굳이 나도 자리를 양보받고 싶지 않았다. 배려는 강요하는 게 아닌 해주면 감사하고 아니면 아닌 거라 생각한다. 다만 의자에 앉았을 때 뱃지를 보이고 있으면 누군가의 자리를 뺏은 느낌이 들지 않아 편했다.


 어느 비 오던 날, 춥고 멀미가 날 것 같아서 처음으로 임산부 뱃지를 앞으로 꺼냈다. 원래는 백팩을 앞으로만 메고 꺼내지 않았었다. 버스는 만석이었고 서 있는 사람도 많았다. 두 정거장 서 있다가 내가 서 있는 곳 옆에 자리가 났는데, 그곳에 앉아있던 젊은 여성이 내리면서 내 뱃지를 힐끔거렸고 그 앞에 서 있던 젊은 남성 두 명도 자리에 앉지 못하고 나를 힐끔거렸다. 나는 감사합니다 하며 냉큼 자리에 앉았지만, 왠지 불편했다. 양보를 강요한 느낌이었고, 존재 자체로 불편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 후로는 굳이 뱃지를 꺼내놓지 않는다.


논쟁거리가 된 임산부 배려석


 임산부 배려석은 가끔 이슈가 된다.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남성들을 찍어 제보하는 사람도 있었고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임산부를 임산부가 아닌데 왜 앉냐며 50대 남성이 폭행하는 일도 있었다.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둬야 하나 아닌가로 자주 인터넷에서 논쟁이 벌어진다. 임산부가 되어보니 그렇게 임산부 배려석을 지켜주는 이들이 고맙기도 하고, 동시에 그렇게 제보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임산부가 오면 비켜줄 마음으로 앉아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남녀갈등의 한 축이 된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고, 굳이 임산부 배려석이 일반석에 있어야 하나 싶기도 하다. 노약자석에 마련할 수는 없었을까? 하긴, 지하철 있는 도시에서 살 땐 임신하면 당당히 노약자석에 앉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임신하고 보니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임산부뱃지도 민망해서 꺼내놓지 못하는데 말이다.


 내가 원해서 한 임신으로 유세 피우고 싶지 않다. 굳이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놓기보다는 그곳에 앉았다면 임산부가 보일 때 일어나주면 고맙겠다. 간혹 임산부 배려석을 저급한 말로 비하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본인도 임산부에게서 태어났으면서….
 임산부에게 혹시나 자리 양보를 해준다면 그냥 어르신분께 자리 양보를 해주는 그 정도의 마음으로 해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노인이 될 것처럼, 우리는 모두 한때 아기였고 엄마 배 속에서 있었으므로.


위험한 인도와 횡단보도


 임신을 하고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인도와 횡단보도가 생각보다 위험하다는 점이었다. 출퇴근 시 큰 대로변을 걸어 다니는데, 그 길에는 인도와 자전거전용도로가 함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자주 자전거전용도로로 달리는데, 가끔 인도를 침범하기 때문에 가끔은 위협을 느낀다. 매일 건너는 신호등에서는 보행자 신호가 초록 불이어도 차들이 늘 우회전을 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사람이 건너고 있어도 쌩하니 가버리고 차 앞을 사람이 지나고 있으면 눈치를 주듯 조금씩 차를 움직인다. 인도와 횡단보도에서는 안전을 위협당하고 싶지 않다.


생각보단 덜 힘들지만, 그래도 임신은 힘들어


 입덧이 없고 불편한 점이 많이 없기 때문에 남들보다 임신이 수월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임신은 힘들다. 누군가 말했던, 임신이 아니라면 병자라고 하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는 임신 6주쯤 되자 입맛이 없어졌다. 그런데 배는 고프고 아이가 있기 때문에 억지로 먹어야 해서 힘들었다. 보통 임신하면 먹고 싶은 게 많이 생긴다고 하는데 나는 먹고 싶은 게 없었고, 좋아하던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어서 괴로웠다. 미각을 잃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좋아하던 치킨과 라면을 먹었는데 맛이 없어서 충격적이었다. 밥을 먹어도 배가 차질 않고, 배고픔이 지속하여서 좀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계속 배고프니 미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먹을 수라도 있지, 좀비는 바로바로 피를 마실 수가 없으니 너무 안타깝다. 밥을 먹으면서도 배고파, 먹고 나서도 배고파, 라고 했고, 밥 먹고 한두 시간 정도는 배부르다가 다시 배가 고파졌다. 다행히 12주가 되자 입맛은 거의 돌아왔다. 하지만 배고픔은 더욱 극심해졌다. 신생아처럼 2시간에 한 번씩 간식을 챙겨 먹고 있다.
 몸은 피곤하고 집안일은 귀찮기만 했다. 원래 불면증이 있어서 그런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수면유도제를 먹을 수 없으니 더욱더 힘들었다. 잠은 잘 못 자서 피로하고 배는 계속 고프고, 가끔 어깨와 허리가 쑤셨다. 임신 초기가 이런 데 임신 후기는 어떨지 겁도 난다. 화장실은 너무 자주 가고 싶다. 꼭 새벽 2~3시에 화장실을 갔는데, 이 소변의 원천은 대체 어디인 건지 너무나 궁금했다. 일부러 자기 전에는 물도 마시지 않았는데 화장실을 두세 번 연달아 가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눈물 장벽이 무척 낮아졌다. 부모와 자식 간의 조금만 슬픈 이야기가 나오면 감정이입이 빠르게 되고 눈물이 폭발한다. 현대차 '두 번째 걸음마' 광고를 보다가도 울고, 미녀와 야수에서 주전자와 찻잔 모자가 사물이 되며 헤어지는 5초도 안 되는 짧은 장면을 보고도 펑펑 울었다. 나도 신기한데 그 순간 너무 슬퍼서 참을 수가 없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난다) 많이 울까 봐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는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연인과 슬픈 사랑이나 우정 등에는 정말 무덤덤하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현빈과 손예진이 오열하며 슬픈 이별을 하는데 전혀 관심이 생기질 않았다.
 편한 점도 있다. 흔히들 임신하면 감정 기복도 심해진다고 하는데, 나는 임신 전에 원래 감정 기복이 심해서 오히려 임신하고 기복이 줄어들어서 편하다. 기분이 들쑥날쑥했는데 거의 긍정적인 기분이 유지되고 있고 힘든 일이 있어도 아이 생각해서 좋은 생각 해야지 하며 빨리 추슬러 진다. 물론 밥을 제때 안 먹으면 폭군이 된다.


 이상하게도, 남편이 임신해서 힘들고 고생이 많지, 라고 하자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아니야, 남들 비해서는 고생도 아니야. 입덧도 없고 수월한 편이야."
 분명 임신해서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괜찮은 척 말했는지 나도 의문이다. 괜찮은 척을 하고 싶었던 걸까? 만약 남편이 너는 임신이 힘든 것도 아니야, 입덧도 없고 별 증상이 없잖아, 라고 했으면 화를 냈을 것 같다.
 그래도 임신 전에 겁을 냈던 것보단 임신이 수월하다. 임신하면 무조건 입덧을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다. 입맛이 없을 때는 이렇게 먹는 게 힘들어서 둘째는 어떻게 낳나, 싶었는데 괜찮아지니 벌써 둘째를 낳고 싶다. 앞으로 2/3가 남은 임신 기간이 이제까지처럼 수월했으면 좋겠다. 임신, 생각보다 괜찮았어! 라고 말할 수 있기를.


내 덕 vs 아이 덕


 어제, 갑자기 브런치에 올린 글의 조회수가 급증했다. 하루에 50명만 방문해도 많이 접속하는 브런치였는데 갑자기 한 글의 조회수가 1,000건을 돌파했다는 알람이 오더니 점점 빠른 속도로 2,000건, 3,000건, 자기 전에는 6,000건까지 달성했다. 궁금해서 통계를 보니 다음 메인의 유입경로가 가장 많았다. 알고보니 다음 메인에 내 글이 소개되어 있었다. 몇 년간 모아온 조회수가 어제 하루 조회수와 같을 정도로 조회수가 급등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남편에게 자랑했다.
 "내 덕에 우리 모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다음 메인에 떴네! (메인에 아이의 초음파 사진이 함께 올라가 있었다)"
 그러자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모네 덕에 자기가 다음 메인에 뜬 거 아냐?"
 순간 내가 너무 나 중심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글 쓴 건 난데 왜 아이 덕인가 싶었다. 물론 아이 이야기를 써서 메인에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모성이 조금 부족한 걸까?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누구 덕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둘 다의 덕이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그런 방법이...! 내가 너무 성과를 인정받고 싶어서 야박했나 싶다. 그런데 나는 평생 이렇게 나 중심적으로 생각할 것 같다. 아이도 소중하지만, 내가 더 소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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