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a May 03. 2020

애매한 재능의 저주

"내 자식은 그림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다.


 기억이 있는 6살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고, 초등학생부터 여가 시간을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으며 보냈다. 초등학생 때 방학 숙제로 몇 번 단편 만화를 그려서 제출했으며, 매년 그림 공책을 여러번 바꿨다. 초등학생 때는 만화가, 중학생 때는 애니메이터, 고등학생 때는 웹툰 작가가 되고 싶었다. 다른 학원에 다닌 기억은 잘나지 않는데, 유치원생일 때 미술학원에 다녔던 기억과 중학생 때 미술학원에 다닌 기억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중3 때 아버지께 처음으로 크게 반항했던 게 애니메이션고 진학 문제였고(아버지의 반대로 결국 원서도 넣지 못했다) 고2 때 아버지와 두번째로 크게 싸웠던 게 디자인과 진학 문제와 입시 미술 준비 문제였다(아버지의 반대로 포기했다). 상경계열로 진학 후 한동안 내 인생이 잘못 흘러온 게 아닐까 자주 생각했고, 취직 후 내가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게 다행이며 아버지의 만류가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애매한 재능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그림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했고 이루지 못한 꿈은 나를 옭아맸다. 디자인과 진학을 포기한 이후 나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었다. 친구들의 디자인과 진학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아팠고, 왠지 모르게 나 자신이 부끄럽고 초라했다.


 취직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다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었고, 곧 수채화 그리기를 시작했다. 몇 년 만에 물감과 스케치북, 붓을 사며 설렜지만, 취미는 오래가지 못했다. 형편없는 내 실력에 실망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과연 이 수준이 유년시절 내내 그림을 그렸고 업으로 삼기를 원했던 사람의 실력이 맞는지 실망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림 그리기는 시들해졌고 그림 도구는 어딘가에 처박혔다.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임신을 하고 태교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고, 모네 그림을 하나 걸어놓고 싶어서 명화 그리기 DIY 세트를 알아보다가 코로나 때문에 품절이길래 구매할 수 있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어느 날 집 정리를 하다 물감과 팔레트를 발견했다. 다시 수채화 책 첫 페이지를 펴고, 처음부터 따라 했다. 물을 잔뜩 적신 물감이 스케치북을 물들였다. 흑백이던 세상이 화사한 빛깔로 피어나는 것 같던 순간.
 아무런 기대도, 목표도 없이 그리는 그림은 즐거웠다. 같은 그림을 여러 번 그리니 꽤 그럴듯해 보였다. 그림 도구를 사러 화방으로 가는 길에 많은 입시 미술 학원이 보였고, 나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자식은 그림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도 연락하는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 몇은 디자인과를 가서 관련 직업을 가졌다.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본 그림 관련 직종은 그랬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큰 직업. 회사에 입사하는 순간 자신이 하고 싶은 그림은 그릴 수 없고, 명확하지 않은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입시 미술에선 시간에 맞춘 정형화된 스킬을 배웠지만, 대학에서는 창조성을 요구당하고, 직장인이 돼서는 정형화된 결과물을 요구당하는 아이러니한 분야. 물론 아닌 작업도 있지만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 대부분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맞춰줘야 하는 직업을 가진다. 친구 A가, B가, C가, D가 그랬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자 남편은 대부분의 직업이 그렇지 않으냐고 말했다. 그래서 난 내가 그림을 업으로 삼고 싶었고 다른 직업에 비해 관심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난 아이들 앞에선 그림 안 그릴 거야. 아이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좋겠어."
 자녀들이 커서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태명도 화가의 이름을 땄으면서, 모순적인 말을 하고 말았다.


 남편은 육상을 하고 싶었다. 초등학생 때 육상부였고 꽤 두각을 나타냈다고 했다. 나와 비슷하게 부모님의 반대로 육상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림에 열등감을 가진 나완 달리 남편은 그 이후로도 여러 운동을 즐겼다. 거의 모든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을 좋아하고, 하는 것을 즐긴다. 일주일에 한 번 풋살을 하러 다니기도 했고 자전거로 전국 종주도 했다. 남편은 자녀 중 한 명이 운동선수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도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장 좋지 않은 결과를 생각한다. 운동을 하면 뒷바라지하는데 돈이 많이 들면 어쩌지? 한 스포츠스타의 어머니가 동생 뒷바라지를 한다고 언니가 가수 하고 싶다는 걸 만류했다는데, 만일 그런 식으로 다른 자녀에게 관심을 덜 주게 되면 어쩌지? 만약 운동선수로 성공하지 못하고 큰 좌절을 느끼면 어쩌지? 뭐든 잘될 거라는 남편의 생각과는 달리, 내 생각은 늘 이런 식으로 부정적으로 흘러간다.


 남편과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루지 못한 건 똑같은데 왜 다른 결과가 나왔을까? 여전히 나는 이이가 미술을 전공하지 않으면 좋겠다. 아이가 미술을 전공하고 싶다고 하면 가슴이 아플 것 같다. 날 닮아서 그림을 좋아한다고 자책할 것 같다. 남편은 아이가 운동을 잘하면 자신을 닮았다고 좋아할 텐데.
 여전히 내게 이루지 못한 꿈은 아픈 걸까.




 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닮았다. 할아버지는 몇십 년 동안 꾸준히 일기를 쓰고 계시고, 90세의 연세에 수기로 쓴 일기를 워드로 옮기신 후 인쇄하여 할머니께 보여드리고 있다. 아버지는 가족밴드에 꾸준히 글을 올리시고 있고, 6개월 동안 책 한 권의 분량을 쓰셨다. 그래선지 내가 어릴 적 글로 상을 받을때면 O작가라며 좋아하셨고, 결혼 전 글쓰기 모임에서 문집을 냈는데, 내가 쓴 소설만 재인쇄해서 하객들에게 나눠주자고 할 정도로 좋아하셨다. 나는 내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은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나도 아이가 글을 쓴다거나 글에서 두각을 보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림에서 두각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글을 쓰면 위로를 받지만 그림을 그리면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아서였을까. 알 수 없는 이상한 마음이다.
 이것도 내가 극복해야 하는 마음이겠지.




 요즘은 거의 매일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릴 때는 평소에 활발히 느끼던 태동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집중하고, 잠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고 시계를 보면 어느새 한 시간이 흘러있다.
 요즘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 가장 즐겁다. 십 대의 여느 날처럼.

나의 팔렛트와 붓

Copyright 2020. NULL All rights reserved.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증 환자의 행복한 임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