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한 파트타임 과정은 Joint degree과정이어서 스페인과 싱가포르 양쪽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프라인 수업을 분기마다 각 도시에 위치한 학교 캠퍼스에서 공부해야 했기에 직접 스페인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야 했던 것이다. 정열의 나라 스페인을 여행이 아닌 공부를 하러 떠나다니, 기대됐다.
마드리드의 눈부신 태양
항상 싱가포르를 베이스로 아시아 나라들로만 여행했던 나로서는, 유럽 대륙에 위치한 스페인으로 가서 공부하는 것 자체가, 여태까지 해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유학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서 엄청 설렜다. 학부시절 교환학생을 가고 싶었지만 생활비의 부담감 때문에 현실적으로 갈 수 없었던 시절을 지나 이제 내 힘으로, 내가 스스로 번 돈으로 공부하러 가는 여정 자체가 그렇게나 뿌듯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고등학교 시절 스페인어를 제2 외국어로 공부했었기에 그래도 조금이나마 그때 배운 말들을 사용해볼 수 있을까 싶어서 더 반가웠다. 물론 기억나는 문장들은 손에 꼽지만...
두바이를 경유해서 18시간의 길고 긴 비행 끝에 에어비앤비 숙소에 짐을 풀고 방안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은
싱가포르에 처음 왔을 때 느꼈던 그 도전정신 내지는 기대감과는 달리, 아직 어린 아가를 두고 와서 그런지, 다시 혼자가 된 듯, 텅 빈 듯한 외로움이 엄청 크게 느껴졌다. 싱가포르와 달리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더 휑한 느낌이었다. 과정 시작 전에는 솔직히 1-2년쯤 가족이랑 떨어져 있어도 시간이야 금방 갈 거니까 크게 상관없지 않을까 했었는데 만약 풀타임으로 외국에서 계속 있었다면 견디기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텅 빈 외로움의 감정적 사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도착한 첫날부터 미리 도착한 친구들끼리 먼저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첫날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친구들은 정말 백그라운드가 각각 너무 달랐다. 우리들은 3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어 기네스북에 등재된 식당이라는 [보틴]이라는 곳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모든 건물이 거의 새것이고 리노베이션을 하는 싱가포르와 달리,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공간에서 하는 만남이 너무 색달랐다. 벨기에, 스페인, 독일, 호주, 스위스, 러시아, 레바논, 인도, 미국, 멕시코, 캐나다, 태국, 싱가포르, 일본, 베트남, 말레이시아였는데 거의 겹치는 나라가 드물 만큼 다양한 나라 출신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나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수업 종강 후
스페인에서의 시간은 파트타임 과정이라 조금 여유롭지 않을까란 생각을 단숨에 꺾어준 시간이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일찍부터 7시까지 수업 끝나고서도 계속해서 팀 프로젝트 때문에 새벽 1시까지 남아서 과제하고 토론하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첫날부터 쏟아지는 과제에 이거 실화냐 (Is this real?) 고 하면서 우리는 팀 미팅에 몰입했다. 제한된 시간 때문에 우리들은 각자 역할분담을 하고 리더인 친구가 우리가 조사한 자료를 정리해서 발표자료를 준비하는 식으로 했다.
새벽 1시가 가까워오는 시간이 돼서야 겨우 숙소로 돌아가는데 근처 호텔에 묵었던 호주 출신 친구와 같이 이것이 첫날인 게 믿기지 않는다며 우리 앞으로 졸업은 무사히 할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며 스페인의 거리를 걸었다. 그 친구는 무려 아이가 셋이나 있고, 지금은 필리핀에 위치한 글로벌 은행에 다니는 워킹맘이었다.
우리는 두고 온 아이들이 보고 싶다는 공감대를 나누며, 아이들이 우리에게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있는 것이니까 이 시간이 헛되지 않게 졸업까지 파이팅하자고 서로를 격려했다.
심지어 팀 미팅 끝나고서도 파티 가는 친구도 있었다. 나이가 나랑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었고, 경력도 대부분 평균 8 년 이상이라서 중간관리자에서 시니어 사이로, 직장에서의 직급도 나랑 비슷한 친구들이 꽤 많았는데 다들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수업 중간중간에 시내 관광은커녕, 과제에 파묻혀 지냈던 스페인이었기에, 수업이 끝나고서 휴가를 추가로 더 내어 시내 관광과 스페인 내 다른 도시들을 추가로 여행한 친구들도 있었다.
스페인에서 기억에 남는 수업들을 몇 가지 적어보자면,
-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 케이스 스터디의 무지막지한 자료들을 읽느라 고생하고 팀 미팅으로 케이스 스터디 문제 답변을 준비하느라 제일 고생을 많이 했던 수업이었다.
- 프레젠테이션 스킬 : 무작위로 콜드 콜을 받아서 발표하는 우리의 모습을 교수님은 비디오로 찍어서 서로 크리틱을 하는 과정이었는데, 막상 발표할 때는 긴장했지만 퍼블릭 스피킹 스킬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 커리어 컨설팅 : 포스트 MBA 진로가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 알아볼 수 있던 시간이었다. 유럽에 취업을 원하는 학생들을 위해 이력서, 모의 면접 컨설팅도 진행되었다.
- 거시경제 : 스페인어 억양이 강한 영어의 교수님이 인상적이었는데, 블룸버그 터미널 실습도 할 수 있어서 친숙한 느낌이었다.
- 회계 : 재무제표에 있는 항목들 하나하나를 다 외워야 해서 고생스러웠으나, 우리 팀에 있던 재무팀 출신 친구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던 수업이었다.
그동안 너무 하고 싶었던 과정이기도 했고 학생 신분의 로망에 대해 엄청난 기대를 갖고 시작했지만 역시 예상처럼 만만치 않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밤늦게 돌아올 때마다 숙소 도착하자마자 곯아떨어져서 눈을 잠깐 붙이고 아침에는 잠을 쫒느라 카페꼰레체를 마시며 수업준비 하기에 바빴다. 공부는 무엇보다 체력이 관건인 것 같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래도 제일 기억에 남았던 건, 바로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었다. 대기업이나 스타트업 같은 직장을 다니는 친구,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친구, 사업하는 친구, 프리랜서로 일하는 친구 등, 경력이나 백그라운드가 엄청 다양해서 케이스 스터디 때도 새로운 시각을 보여줘서 흥미로웠다. 수업시간에는 서로들 발표하려고 난리여서 오히려 발표 안 하는 게 튈 정도였다. 평소에 조용하게 수업 듣는 스타일이지만, 이런 peer pressure 때문에 덩달아 발표하면서 자극받았던 시간이었다.
마치 일 년같이 지나간 일주일이었지만, 스페인에서 공부하면서 그동안 했던 직장생활을 돌이켜보고 나를 전혀 다른 새로운 환경에 노출시킨 상태로 지식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관점에서도 새로운 시각을 배울 수 있어서 의미 있었다. 그리고 비록 잠깐이었지만, 떨어져 있으면서 가족의 소중함도 다시 한번 느끼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