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6
회사를 옮기거나 독립을 결심했을 때, 우리는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그대로 인정받을 거라 믿습니다. 그런데 막상 밖으로 나가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분명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했는데, 설명할 게 없습니다. 이력서에 적을 건 많은데, 정작 "그래서 회사 타이틀 없이 혼자서 뭘 할 수 있어요?"라는 질문 앞에서는 말문이 막힙니다.
저는 이런 분들을 '내수용 인재'라고 부릅니다. 능력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주 유능하지만, 그 유능함이 특정 환경에서만 열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마치 특정 프로그램에서만 열리는 파일처럼, 환경이 바뀌면 '호환되지 않는 파일'이 되어버리는 거죠. 가장 무서운 건,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가 '실력'이라고 믿어온 많은 것들이 사실은 회사라는 배경 덕분에 빛났던 '조건부 역량'일 수 있습니다. 물론 회사 생활을 잘해냈다는 훌륭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이것들이 '나의 온전한 실력'인지, 회사를 떠나는 순간 사라질 '조건부 역량'인지 말이죠.
우리가 모르는 사이 기대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회사 종속이 있습니다. 사내 정치 지형을 꿰뚫고, 내부 시스템과 보고 체계에 통달한 능력. 분명 훌륭한 적응력이지만, 이직하는 순간 리셋됩니다. 새 회사엔 김 부장님이 없고, 시스템도 다르며, 당신이 누군지 아무도 모릅니다.
산업 종속도 있죠. 특정 환경이나 시장의 특수성에 기댄 비즈니스 감각. 그런데 산업의 문법은 생각보다 빨리 바뀝니다. 어제의 핵심 역량이 내일은 낡은 방식이 되기도 합니다.
규모 종속은 더 교묘합니다. 대기업의 세분화된 R&R에만 익숙해지면, 프로세스가 없는 곳에서는 손발이 묶입니다. 반대로 스타트업의 환경에서 일해온 사람은 체계적인 조직에서 숨이 막히죠. 어느 쪽이든, 특정 규모에서만 열리는 파일이 됩니다.
형식 종속도 흔합니다. PPT 디자인과 구성에는 목숨을 걸지만, 정작 알맹이는 빈약한 경우이죠. 형식이 사라진 백지 상태에서도 문제를 정의하고 풀어낼 수 있어야 진짜 실력입니다. 예쁜 템플릿은 어디서든 구할 수 있지만,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드무니까요.
이 중 하나라도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위 내용을 보며 "나는 아닌데"라고 안도하셨나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진짜 내수용 인재일수록 자신이 조직 안에서만 최적화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지금 환경에서는 파일이 잘 열리니까요.
하지만 언젠가 환경은 바뀝니다. 리더가 바뀌거나, 팀이 해체되거나, 기술이 뒤집히거나, 심지어 회사가 없어지기도 합니다. 그때 가서 "내가 쌓은 게 밖에서는 안 통하네"를 깨닫는 건 너무 늦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회사를 벗어나도 열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많은 분이 기술(Skill)이나 자격증을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일의 주도권을 '나'에게 가져오는 것입니다. 내수용 인재는 회사가 목표를 내려줄 때까지 기다립니다. 주도권이 '회사'에 있습니다. 반면, 어디서든 열리는 사람은 스스로 목표를 정의하고 움직입니다. 주도권이 '나'에게 있습니다. 이 차이가 결국 호환성을 가릅니다. 어디서든 열리는 파일인지, 아니면 특정 환경에서만 열리는 파일인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도권을 가져오려면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까요?
스스로의 한계를 넘는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보통의 직장인은 회사가 부여한 KPI를 달성하는 데 만족합니다. 하지만 회사가 준 목표는 최소한의 기준일 뿐입니다. 그 위에 스스로 더 도전적인 질문을 얹어보세요. "이번 달 매출 목표 달성"에 그치지 않고, "이 매출 구조 자체를 바꿀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는 것. 회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도전이 나의 역량 그릇을 키우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향해 파고드세요. "원래 이렇게 하는 거라서요", "전임자가 한 대로 했습니다"라는 말은 핑계가 아니라 고백에 가깝습니다. 나는 사실 이 일의 본질을 모른다는 부끄러운 고백이요. 관행과 매뉴얼 뒤에 숨지 말고, '왜?'라는 질문을 던지세요. 이 일이 왜 필요한지, 더 나은 방법은 없는지. 그 고민의 시간이 어디서든 통하는 문제 해결력을 만들어줍니다.
고민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나만의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세요. 시키는 대로만 하면 실패는 없겠지만, 성장도 없습니다. 회사에 몸 담고 있을 때, 저는 늘 기존 방식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새로운 걸 제안하고 실험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물론 늘 결과가 좋았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 부딪히며 배운 것들이 지금 이 새로운 시작 앞에서 쉽게 포기하지 않게 해주고, 앞으로 10년을 지탱해줄 '일 근육'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회사 안에서의 실험은 개인의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얻는 데이터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 되죠.
노하우를 '범용 포맷'으로 변환하세요.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험해서 얻은 결과를 머릿속에만 두지 마세요. '감'은 호환되지 않습니다. 나만 아는 방식을 남들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구조화하세요. 매뉴얼을 만들거나, 템플릿으로 정리하거나, 글로 써서 공유하거나. 이 과정이 당신을 '특정 회사에서만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어디서든 열리는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당신은 회사의 배경과 지원 안에 있지 않아도, 나 스스로 온전히 작동할 수 있는 사람인가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어디서든 호환되는 사람입니다.
파일이 열리지 않는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그때 가서 포맷을 바꾸려 허둥대지 않도록, 지금 당장 내 호환성을 점검해보세요.
당신이 어디서든 열리는 파일이 되길 바랍니다. 나의 가치는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 정의하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