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의 시대는 갔다, 이제는 핏(Fit)이다.

EP 07

by 김윤진

"토익 900점에 자격증도 5개나 있는데, 왜 자꾸 서류에서 떨어질까요?"

"누구나 아는 대기업에서 10년을 다녔는데, 왜 스타트업 서류 전형에서조차 합격하지 못할까요?"

취업이나 이직을 준비하는 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하소연입니다. 불안한 마음에 자격증을 하나라도 더 따고, 경력 기술서에 한 줄이라도 더 채워 넣으려 애씁니다. 자신을 마치 마트 진열대에 놓인 '공산품'처럼 대합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비싸게 팔리기 위해, 기능 즉 스펙을 덕지덕지 붙이는 식이죠.


하지만, 기업의 채용 담당자로서 지켜봐 온 냉정한 진실을 하나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당신이 선택받지 못한 건 '스펙'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요즘 지원자들의 스펙은 차고 넘치는 '오버 스펙'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문제는 스펙의 '높이'가 아니라, 변화하는 시장과 당신의 역량이 맞물리지 않는 '핏(Fit)'의 부재에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열심히 쌓은 스펙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된 걸까요? 이것은 당신의 부족함 때문이 아닙니다. 게임의 규칙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보호막의 붕괴 : '평생직장'의 종말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기술의 변화 속도에 있습니다. AI와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직무와 기술의 수명은 급격히 짧아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특정 역량의 유효기간은 이제 3년을 넘기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런 속도전 속에서 과거의 '평생직장'이라는 약속은 깨졌습니다. 과거에는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회사에 들어가면, 회사의 시스템이 나의 정년과 커리어를 책임져주었습니다. 이때의 커리어는 회사가 주도하는 '회사 기반 커리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기업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조직을 바꾸고 인력을 재배치해야 합니다. 회사가 나를 지켜주던 보호막이 사라진 것입니다. 결국 커리어의 책임은 조직에서 개인으로 넘어왔고,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시키고 지켜내야 하는 '자기 기반 커리어'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기준의 이동 : '완성형 인재'에서 '적응형 인재'로

커리어의 중심축이 '회사'에서 '개인'으로 이동하면서, 인재를 평가하는 시장의 눈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과거, 일이 표준화되어 있던 시절에는 'Best One(최고의 인재)'을 뽑는 게 정답이었습니다. 학벌이 좋고, 학점이 높고, 영어 점수가 높은 사람을 뽑으면 일도 잘할 것이라는 믿음이 유효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완성된 스펙'이 곧 실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기업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매일 바뀌고, 어제의 정답이 오늘은 오답이 됩니다. 맥킨지는 현재 기업이 요구하는 기술의 50%가 5년 내에 쓸모없어질 것이라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시장은 '이미 완성된 고스펙자'가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스스로를 갱신할 수 있는 'Right One(적응형 인재)'을 찾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스펙을 가졌어도, 새로운 툴을 배우기를 거부하거나 조직의 변화 속도에 맞추지 못하면 부적합 판정을 받습니다. 반대로 스펙이 평범해도, 낯선 환경에서 빠르게 학습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사람은 귀하게 모셔갑니다. '절대적인 스펙'의 시대가 가고,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곧 최고의 핏(Fit)이 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새로운 생존 공식 : 고용 '상태'를 넘어 생존 '능력'으로

이러한 구조적 변화 속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도 바뀌어야 합니다. 단순히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고용'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 불안을 잠재울 수 없습니다. 회사가 나를 지켜주지 않더라도, 언제든 시장에서 선택받을 수 있는 힘인 '고용가능성(Employability)'을 확보해야 합니다.

고용가능성이란 단어 때문에 "평생 취업 준비만 하라는 거냐"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의하는 진짜 의미는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는 힘, ‘자생력(自生力)'에 가깝습니다.


세계경제포럼(WEF)과 OECD 역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 학습하고(Learning Agility),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미래 인재의 가장 중요한 생존 조건으로 꼽습니다. 복잡한 이론 다 치우고, 딱 3가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회사가 망해도 당장 내일부터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는가?

지금 가진 기술이 AI로 대체되어도 새로운 기술을 배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조직의 명함 없이도 나만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가?

저는 '자생력이 검증된 상태'를 '커리어 핏이 높다'고 정의합니다. 단순히 특정 회사와 궁합이 잘 맞는다는 좁은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시장 환경, 어떤 조직 시스템에 던져져도 내 역량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게 만드는 '생존 호환성'을 의미합니다.


스펙은 '옷'이고, 핏은 '근육'이다

저는 이 변화를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스펙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옷'이라면, 커리어 핏은 어떤 환경에서도 나를 움직이게 하는 단단한 '근육'입니다.

과거에는 좋은 옷(학벌, 자격증)만 걸치면 면접관의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시장은 포장지인 옷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본질(알맹이)'을 봅니다. 지식과 기술의 반감기가 짧아진 지금, 화려한 스펙은 시간이 지나면 유행 지난 옷처럼 낡아버립니다. 하지만 근육은 쓰면 쓸수록 단단해지고, 어떤 짐을 지더라도 버텨냅니다.

이제는 겉치레를 덧입는 게 아니라, 화려한 장식 없이도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일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낯선 환경에서도 빠르게 적응하는 유연성, 답이 없는 문제에 부딪히는 실행력, 그리고 내 가치를 스스로 갱신하는 회복탄력성.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갖춰야 할 진짜 경쟁력입니다.


생존을 위한 3가지 축 : B·S·E 프레임워크

그렇다면 이 '일 근육'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막연히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식의 조언은 하지 않겠습니다. 커리어 핏은 다음 세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할 때 완성됩니다. 이른바 'B·S·E 프레임워크'입니다.


Behavior (행동 역량) : 내면의 엔진 | 환경이 변해도 무너지지 않게 하는 기초 체력입니다. 학습 민첩성, 회복탄력성, 주도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Skill (시장 기술) : 실전 무기 | 우리 회사에서만 통하는 기술이 아니라, 시장이 돈을 지불하고 사고 싶어 하는 '현재 시점의 기술'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들이 해당되는지는 다음 화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Environment (성장 환경) : 성장 토양 | 아무리 좋은 씨앗(B, S)도 시멘트 바닥에서는 자랄 수 없습니다. 나를 성장시키는 환경을 스스로 세팅하고 선택하는 능력입니다.

이 세 가지는 덧셈이 아닙니다. 곱셈의 법칙을 따릅니다. 기술(S)이 아무리 뛰어나도 태도(B)가 수동적이라면, 혹은 환경(E)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면, 당신의 커리어 생존력은 결국 '0'에 수렴하게 됩니다.


떠날 수 있는 힘이, 머무를 자유를 준다

스펙 쌓기 게임은 이제 끝났습니다. 나를 규격화된 상품으로 포장하는 것을 멈추고, 대체 불가능한 솔루션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커리어 핏이 높은 사람은 회사에 목매지 않습니다. 회사가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근육을 키웁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생력"을 갖춘 사람만이 회사에서도 당당하게 인정받으며, "선택해서 남는 사람"이 됩니다.


당신은 지금 유행 지난 옷을 고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야생에서도 달릴 수 있는 근육을 키우고 있습니까?

다음 화에서는 이 B·S·E 프레임워크를 통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내 커리어의 근육을 단련할 수 있는지 하나씩 뜯어보겠습니다. 막연한 불안을 확신으로 바꾸는 '실전 트레이닝'을 시작할 시간입니다.

keyword
이전 06화회사 밖에서 열리지 않는 파일, 내수용 인재의 비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