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인생은 놀라울 정도로 짧구나. 이제 내 기억 속에서 삶은 너무나 작게 쪼그라들어서, 예컨대 어떻게 한 젊은이가 말을 타고 이웃 마을에 갈 결심을 할 수 있는지, 불행한 사고는 논외로 한다고 해도, 행복하게 흘러가는 평범한 인생의 시간조차 그런 나들이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텐데 그게 두렵지도 않은지, 잘 이해하지 못할 지경이다."
당신은 방금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1개를 완독했다. 카프카는 수많은 단편 작품을 남겼는데, 위의 작품은 《이웃 마을》이라는 작품이다.
나의 독서 습관 중 하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책상 옆에 꽂힌 단편 소설을 랜덤하게 펼친 다음, 그 작품을 읽어내려가는 것이다. 나는 《이웃 마을》이라는 작품을 1분만에 읽었지만, 이게 카프카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음미하며 30분을 소모했다.
이 문장을 읽고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누군가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며 공감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모두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개방성이 유난히 높았다.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느라 집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길을 잃기 일쑤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대체 어떤 에너지로 두려움 없이 낯선 곳을 배회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카프카 특유의 은유를 고려한다면, 이 글은 단순한 노년의 회상을 넘어선다. 이 짧은 글의 제목이 '짧은 삶'이나 '어린 시절'이 아닌 《이웃 마을》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이웃 마을'은 무엇을 상징할까?
나는 이웃 마을을 '외재적 동기' 혹은 '외재적 가치(Extrinsic Value)'로 해석한다. 젊은 시절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외부의 무언가다. 수십 개국을 떠돌던 과거의 나에게 이웃 마을은 '선진국'이었고, 그곳에서 돈을 많이 벌어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행복이라 믿었던 나의 욕망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한국에 머물고 있다. 많은 이들이 '헬조선'이라 부르며 높은 자살률과 낮은 행복도를 비판하는 이곳에서, 나 역시 날 선 비판의 글을 쓰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나는 왜 이곳을 떠나지 않는가?
답은 간단하다. 지금 이곳에서 행복하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든 당신은 결국 당신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고 했던 헤밍웨이의 말처럼, 나는 방황 끝에 내가 태어난 이곳만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없음을 깨달았다.
다시 카프카의 글 속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빌려본다. 할아버지는 과거에 자신이 어떻게 말을 타고 이웃 마을에 갈 결심을 했는지 한탄한다. 나 역시 더 나은 미래, 더 큰 성공, 부와 명예라는 외재적 가치를 얻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떠돌던 시절을 떠올린다.
반면 현재의 나는 여권조차 갱신하지 않은 채, 조만간 이사할 조용한 시골에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성장하는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를 중심으로 삶을 완전히 재편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이웃 마을의 누군가처럼 되고 싶지 않다. 내가 사는 우리 마을에서 '나답게' 살기를 원하며, 이곳 사람들이 각자의 내재적 가치를 발견하도록 돕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 카프카의 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웃 마을로 가려는 욕망이 결국 나의 현재를 낭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왜 우리는 더 나은 미래라는 환상을 위해 지금의 삶을 희생하는가?
그 희생이 진정한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가?
이웃 마을을 향한 갈망은 진정 나의 '능동적 프레임'에서 기인한 것인가?
삶은 짧고 유한하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소중한 가치를 추구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젊은 시절 왜 그것을 몰랐는지, 왜 이웃 마을을 기웃거리며 인생을 허비했는지 통탄한다. 나 또한 젊은 날의 나를 돌아보며 묻는다.
'어떻게 젊은 시절의 나는 비행기를 타고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니며 인생을 허비했을까?'
▶ '이웃 마을'을 동경하느라 지친 당신을 위한 《자기이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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