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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아미 Oct 19. 2023

매일 보던 사람을 못 본다는 것




“수술은 잘 됐습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최악 중에서도 최악 수준의 말이라 보호자들이 정신줄을 놓기 딱 좋았다. 


힘든 수술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는- 후에는 거의 모든 의사들이 희망적인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지만 이건 뭐 ‘당신 아버지 미래는 당장 예측할 수는 없지만 아마 산송장입니다’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출혈량은 요구르트 한 병 수준이고 (우리가 한번 꿀꺽하면 없어지는 요구르트 한 병이지만 뇌에서는 엄청난 양) 뇌가 많이 부었고, 피가 이미 오래 뇌를 누르고 있어서 좌뇌의 주먹만큼은 거의 죽어서 말도 못 하고 편마비로 살아야 한다 등… 이 정도 설명이면 아무리 강철 맨탈이라도 절망에 무게에 짓눌려 졸도해 응급실에 실려 갈 것 같았다.


우리에게 희망적이었던 단 하나의 말은 첫 멘트였던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그것뿐이었다.


그렇다고 냉정하게 말하는 의사 선생님에게 좋은 말은 하나도 없냐며 뭐라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그냥 그게 사실이고 이 응급 수술의 결과였다. 여기가 소개팅 장소도 아니고 건강검진 센터에 온 것도 아니니 수술 결과를 미사여구에 없이 전달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게 맞는 거였다. 최대한 포장해서 말을 해준다고 해도 몇 겹의 포장지를 다 열고 나면 결국 위에 나열한 말이 날것 그대로 따끈따끈하게 들어있을 텐데 보호자에게 마음 쓰는 단어가 섞인 말을 들어도 당장만 위로만 될 뿐 우리와 아빠가 처한 상황은 변함이 없을테니 길게 보면 헛된 희망 고문만 받는 일이었다.




수술이 끝난 아빠의 얼굴을 우린 보지도 못했다. (아직도 아빠가 머리를 다 밀고 의식 없이 환자 침대에 실려가는 모습이 생생하다.) 아빠는 지체할 시간 없이 바로 중환자실로 갔고 망할 코로나 덕분에 중환자실은 면회가 전면 금지였다. 아빠가 중환자실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최악의 경우, 돌아가실 때 처음이자 마지막 임종 면회로 보게 될 수도 있었다. 아빠와 죽고 못 사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아빠를 기약 없이 보지 못한다는 건 꽤… 아니, 아주 많이 충격적인 일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아빠가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아침 회진 후 이틀에 한 번 정도 환자 상태 설명을 위해 전화를 주기로 했다. 중요한 처치는 꼭 전화 후 보호자의 구두 동의하에 진행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주말 늦은 수술로 피곤에 절어버린 의사 선생님은 우리를 중환자 간호사실로 인계했다. 이제 간호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을 차례였다.


그곳엔 기계 소리만 삑삑- 울렸고 사람의 소리는 간호사 선생님이 발걸음 소리가 전부였다. 의외로 정말 고요했다. 중환자실 귀퉁이 간호실에 따라가 아빠의 이전 병력과 특이사항을 말하고 첫 번째 보호자에 언니의 이름과 번호를 남겼고 두 번째 보호자에는 내 이름과 번호를 남겼다. 불과 몇 년 전 엄마 망막 수술을 위해 보호자로 이름을 남길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그때는 목숨줄이 오가는 수술이 아니었기에 겨우 하룻밤만 자고 퇴원했고, 적어도 그다음 날의 우리의 삶이 어떻게 굴러갈지 감이라도 있으니 '보호자'라는 이름이 이렇게 무거 울리 없었다.




중환자실을 나올 때 목을 최대한 빼서 아빠로 추정되는 사람의 발끝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꽉 차있는 침상들은 모두 똑같은 병원 이불을 덮고 있어서 아빠를 육안으로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날 그곳을 나오면서 보니 저기에 누워있는 환자들은 자기가 인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촌각을 다투며 온갖 기계와 수액을 달고 살기 위해 누워있는 게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자정이 다 된 시간. 다시 강북에 집까지 형부 차에 실려 집으로 돌아와 보니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있는 엄마가 텔레비전도 꺼둔 채 방에 누워있었다. 한나절 사이 바짝 말라 핏기마저 없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울음을 참는 건 곤욕이었다. 이미 발끝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내 눈물 탱크에는 눈물이 가득 차서 밖으로 방출해 달라며 아우성이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내가 울면 엄마도 울고 밤새 우린 울다가 탈진해서 언니에게 발견될 수도 있었다. 그것만큼 또 다른 최악은 없었다. 그래서 코를 삼키는 척 눈물을 삼키고 내 너덜거리는 마음이 터지지 않게 움켜쥐고 평정심을 쥐어짜 애써 괜찮을 거라고 엄마를 다독인 뒤 지쳐 쓰러져 자버렸다.


내일은 또 내일의 임무가 있으니 밤을 낭비할 수 없었다.

항상 게으르고 계획 없이 베짱이처럼 살던 나에게 이제 시간 낭비는 ‘죄‘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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