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아빠의 모습을 사진으로도 영상으로도 볼 수가 없으니 우리의 심경은 더 참담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있을지 상상조차 안되었다. 이틀에 한 번 정도 언니가 담당 의사 선생님과 전화 통화가 끝나면 매번 연락을 줬지만 마치 목마른 사람에게 하루에 한 번 물을 티스푼으로 한 숟가락만 주는 격이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정도가 됐을까? 결국 아빠는 기도 삽관*을 했다.
[*기도 삽관 : (비의료인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환자가 의식이 없고 스스로 가래를 뱉을 수 없어 기관지와 폐에 가래가 쌓여 호흡이 곤란해지고 폐렴에 걸릴 위험이 생기면 몸 밖에서 기도 쪽으로 관을 뚫어 산소를 공급해 주는 것이다. 그 관으로 카테터를 넣어 수시로 가래를 빼줘야 폐렴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 물론 자가 호흡이 가능해지고 폐 기능도 좋아지면 관을 뽑고 닫을 수 있다. 아빠는 조금씩 회복을 하며 5개월 만에 닫을 수 있었다.]
기도 삽관도 하나의 연명치료다. 하지 않으면 높은 가능성으로 수 일 내에 폐 기능이 떨어지고 폐렴이 와서 돌아가실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삽관도 우리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 중 하나였으나 살리기로 했으니 미룰 수 없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기도 삽관 외에도 이벤트**가 몇 번 있었다. 어느 날은 열이 올라 해열제, 항생제를 맞았다고 했고 뇌의 부기가 빠지지 않아서 잘라둔 뼈를 빨리 닫긴 어려울 거라고 했다.
[**이벤트 : 병원에서 환자에게 생기는 신변의 변화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소식을 들으며 엄마와 나는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간 채 영혼은 차디찬 겨울 한강물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하루에 몇 번씩 이게 과연 진짜 현실인가 싶기도 하고 우리에게는 왜 항상 시련만 가득한 건지 의문이 가득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아빠를 보지 못하는 보름 가까운 시간 동안 서로 정신줄을 놓지 않게 꽉 붙잡는 것.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가고 있었고 이 억겁의 시간이 당장 끝날지 아니면 기약 없이 길어질지 아무도 몰랐기에 다가올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하려면 몸도 마음도 최선을 다해 버텨내는 게 전부였다.
엄마의 의견으로 우리는 아빠의 수술 소식을 아빠가 중환자실에서 나올 때까지 친척들에게 알리지 않고 함구하기로했다. 엄마의 큰 뜻을 자식들이 다 헤아릴 수 없으니 그 선택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소식에 친척들의 연락이 융단폭격으로 올 텐데 똑같은 이야기를 다수에게 반복해야 한다는 게 엄마에게는 정신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큰 짐이었을 것 같다. 이건 전적으로 내 추측이다.) 이 상황을 말한다고 당장 아빠가 중환자실에서 두 발로 걸어 나올 일도 없고 우리의 감정이 개운해질 일도 없는 일 아닌가?
살얼음판 위에서 종종거리고 있는 와중에 큰 외삼촌에게서 연락이 왔다. 엄마와 일 년에 많아야 한두 번 연락해서 안부만 묻는 사이지만 그냥 촉이 그러셨는지 생뚱맞게 연락을 하고 집까지 친히 방문까지 하신 거다. 엄마는 이유는 말하지 않고 만나길 거부했지만 집을 알고 있으니 피할 방법도 없었다. 복잡한 마음으로 외삼촌 내외를 맞이했다.
“뭐라고?! 김서방이 어쩌다가!”
외삼촌과 외숙모는 정말 놀라서 기겁을 하셨다. 평소 건강했던 아빠였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도 못 하신 것 같았다. 엄마는 또 한 번 자존심에 상처가 났다. 가뜩이나 외가 식구들 중 제일 못 사는 본인이 이제는 하다 하다 저 어두운 심연에 꼬라 박힌 상태인 걸 친정에서 알게 됐으니… 얼마나 참담했을까.
“내가 이 꼴을 안 보이려고 전화도 안 받았는데 왜…! 왜…! 찾아온 거야! 아흑…….”
결국 엄마의 처절한 울음에 나도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나까지 통곡을 하며 주저앉을 수는 없어서 눈물 콧물을 열심히 먹으며 혼절 직전의 엄마를 대신해 외삼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잠시 집안이 온통 울음바다였다. 외삼촌 내외의 첫째 아들이 코로나 전에 사고로 뇌출혈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기에 지금 상황이 얼마나 힘들고 환장할 일인지 알고 계셨다. 이 힘든 상황이 말 안 하고 덮어두면 해결될 일이냐고 서로 상황을 알아야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줄 수 있다며 엄마를 다독이셨다.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나눠진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내 일에 한에서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 그냥 슬픔을 나누면 그 감정을 짊어질 사람이 하나 더 생길 뿐이었다. 말하는 나조차도 상대방에게 이 말을 그냥 단순한 ‘근황’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면 어떤 식으로 꺼내야 하나 잔잔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렇게 개탄스러운 상황이 또 있을까?
자신의 인생 무게만으로도 이미 무거운 이들에게 나마저, 우리마저 짐이 되긴 싫다. 그래서 난 정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수준의 상황이나 감정에 오르지 않는 한 입 끝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그렇게 처신하는 게 당장은 그 상황 한가운데에서 이성을 겨우 붙잡고 서있는 나에게도 주위 사람들에게도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한차례 폭풍이 쓸고 간 후 우린 더욱 고요해졌다.
그 고요함에 다시 눈물이 차오를 즘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가 이제 중환자실에서 하루 이틀 후면 나 올 수 있을 거라는 연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