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어 이거 얼만교?”
“이만원예!”
“머 이래 비싸노?”
“아입니더. 우리는 도매라서 헐케 팝니더.”
'서호시장'의 골목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졌다. 싱싱해 보이는 갯장어 한 소쿠리를 두고 노인과 상인의 싸우는 듯 아닌 듯한 흥정이었다. 벌써 여러 번째 내려오는 여행길, 나는 어쩌다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쪽 항구에 툭하면 오게 되었을까?
몇 년 전, 연말이었다. 남산이나 응봉산 같은 곳에서 새해맞이를 하는 루틴이 지겨워질 때쯤, 남편과 나 둘 중 누군가가 말을 꺼냈다.
"해돋이 보러 통영 가볼까?"
"통영? 그래!"
그렇게 얼떨결에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새벽에 도착해 딱히 갈 곳이 없었던 우리는 부둣가를 걷다가 '활어경매장'을 찾았다. 조금 전까지 남해의 깊은 곳에서 유유히 헤엄쳤을 수많은 물고기가 이제는 수조 속에서 펄떡거리고 있었다. 모바일 기기를 하나씩 손에 쥔 중개인들은 분주했고, 거래가 끝난 생선을 착착 실어 나르는 인부들은 추위 속에 땀까지 흘리며 빠르게 흩어졌다. 한 해의 마지막 그 새벽, 사위는 캄캄하고 경매장의 형광등 불빛만이 눈부신 가운데 생경한 그들의 일상을 보며 한동안 넋을 잃었다. 통영의 첫인상은 반짝이는 생명력이었다. 나는 단숨에 이 도시가 좋아졌다.
‘그러니만큼 바다빛은 맑고 푸르다’
<김약국의 딸들>의 첫 장에서 박경리 작가가 상세하게 묘사한 통영의 모습을 상상하며 강구안을 바라보면 다섯 자매의 비극적인 운명이 떠올랐다.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과 마을 각시들이 물을 길으러 왔다던 '명정(明井)새미'를 지날 때면 백석의 <통영2>를 나지막이 읊어 보기도 했다. 그래서, 시인 백석은 타관으로 시집을 간 ‘난’을 못 잊어 그런 절절한 시를 남겨놓고 ‘가난한 내가 사랑한 아름다운 나타샤’는 또 누구란 말인가?
'은하수를 끌어와 무기를 씻다'
이 고장 사람들의 정신적 고향이라 일컬어지는 '세병관(洗兵館)'은 ‘삼도수군통제영’의 ‘객사(客舍)’로 규모가 넓고 웅장하다. 그 이름은 두보의 싯구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왔는데, 더이상 전쟁이 없기를 바라던 당시 사람들의 간절함이 담겨있는것 같아서 마음이 아렸다. ‘통영’이라는 지명도 이곳에서 유래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국민학교로도 사용되었단다. 여기 ‘통영제일공립보통학교’의 졸업생은 김춘수, 유치환, 박경리, 전혁림, 윤이상, 김상옥… 통영은 이런 곳이다. 박경리 작가의 말을 빌자면, “예술가의 수가 모를 부어 놓은 것처럼 많다”고 했다.
첫 여행 이후 다시 내려갈 기회만 찾고 있던 나는, 윤이상 선생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다는 소식에 곧바로 '통영국제음악제'의 티켓을 끊었다. 때마침 주제는 ’Returning Home’ 즉, '귀향(歸鄕)'이었다. 미륵도 언덕 위에 자리잡은 음악당은 날개를 활짝 펼친 갈매기의 모습을 하고 짙푸른 바다를 향한다. 아마도 그 위치 덕에 국내 최고 경관의 콘서트홀이 아닐까 생각한다.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테라스에서 마주하게 되는 바람과 햇살은 또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다가오는지! 윤이상 선생은 그곳의 작은 뜰에 잠들어 있다.
"구라파에 체재하던 38년 동안 나는 한번도 충무를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그 파도 소리는 내게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내게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길고 험난한 모험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 아내 페넬로페의 품에서 휴식을 찾은 오디세이처럼 그도 이곳 통영에서 마침내 평안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매년 벚꽃과 동백이 흐드러지게 피어 도시는 온통 꽃세상이 되고, 도다리쑥국이 맛있어지는 계절에 펼쳐지는 ‘통영국제음악제’는 이렇게 남편과 나의 정기 여행 목록에 추가되었다. 열흘 동안 매일 빼곡하게 프로그램이 채워지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공연을 다 볼 수는 없다. 나는 주말을 이용해 클래식 연주회 한두 개를 예매하고 그 길에 스폿 하나씩을 돌아보는, 말하자면 ‘도장 깨기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번에는 ‘박경리기념관’에 갔다면, 이번에는 ‘이순신공원’, 다음에는 ‘전혁림 미술관’, ‘용화사’, ‘통영 마리나’… 이런 식으로. 그사이 단골 식당도 생겼고 바다전망이 멋진 카페도 다니고 있지만, 아직까지 마음에 드는 ‘다찌’는 찾지 못했다. 애초에 ‘괜찮은 술집’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끔은 드센 사람을 만나 상처받을 때도 있고, 짐작했던 것보다 더 낡은 모습에 실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여긴 ‘바다빛이 맑고 푸른’ 통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