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프로게이머는 짧은 선수 수명을 가지는가

육체 스포츠와 e스포츠 간 차이에 대한 고찰

by Writingonthewall


프로게이머의 수명은 육체 스포츠 종목 선수들에 비해 짧기로 유명하다. 프로게이머들은 대개 10대 후반의 이른 나이에 데뷔하여 20대 초반까지의 짧은 전성기를 갖는다. 그 이후로는 기량이 급격히 감퇴하여 대개 20대 초반, 늦어도 20대 중후반에는 은퇴를 하게 된다. 물론 다른 종목에서도 이처럼 '이른 은퇴'를 하는 선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다른 종목에서의 이른 은퇴는 대개 해당 선수가 주전은 커녕, 백업으로도 뛸 만한 역량도 가지지 못한 것으로 일찍이 판명되어 타의에 의한 퇴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즉, 선수로서의 수명이 다하여서라기 보다, 그저 개인 기량상의 문제로 초래되는 것에 가깝다. 반면 프로게이머들의 이른 은퇴는, 확고한 주전이자 팀의 핵심 멤버로 간주되는 최고 수준의 선수들조차 머지 않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보편적인 경향에 해당하는 것이다.


각자의 신체 및 운동 능력을 활용하여 겨루는 통상의 스포츠 종목에 종사하는 운동 선수들의 경우, (종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큰 부상을 입거나 기량 부족 등으로 조기에 퇴출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10~15년 정도의 활동기를 갖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성기가 도래하는 시기와 그 기간 또한 대개 프로게이머들에 비해 늦고 긴 편이다. 프로게이머들이 데뷔 직후 몇년간 짧은 전성기를 누리고 급격한 기량 하락을 겪으며 은퇴 수순을 밟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프로 운동 선수들은 데뷔 직후 몇년간 경험을 쌓으며 천천히 기량을 끌어올리다가 20대 중후반부터 잠재력을 개화하여 30대 후반에 까지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따라서 야구와 같이 비교적 (노화에 따라 눈에 띄게 감퇴하는) 근, 심폐 지구력, 스트렝스 등을 덜 요구하는 종목에서는 놀란 라이언, 스티브 칼튼과 같이 20년 넘게 활약하는 선수도 종종 볼 수 있다. 럭비, 미식축구, 복싱, 종합 격투기, 아이스하키와 같이 선수들 간의 컨택이 잦고 과격하여 부상 빈도가 높기로 유명한 몇몇 종목에서도 많은 선수들이 (상대 수비수의 거친 태클, 충돌, 블로킹 등 경기중 다른 선수의 '합법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프로게이머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오랜 기간동안 선수 생활을 한다. 개중에는 톰 브래디, 매니 파퀴아오, 에밀리아넨코 표도르처럼, 20년이 넘게 현역 생활을 잇는 선수들도 있다. (물론 이들은 각 종목의 전설적인 존재들이다.) 그런데 왜 몸 상할 일 없이 앉아서 게임만 하면 되는 프로게이머들은 정작 오랫동안 제 기량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사실이 이러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가장 크고 핵심적인 이유는 프로게이머의 핵심 역량이 순발력과 연산 능력, 멀티태스킹 능력 따위의, 나이가 듦에 따라 가장 빠르고 급격하게 감퇴하는 신체 기능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여 성립한다는 사실에 있다. 게임 중인 프로게이머는 기본적으로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단지 화면에 표시되는 때마다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조작을 취할 뿐이다. 프로게이머는 운동 선수와는 달리, 자신의 압도적인 완력과 기교로 상대를 압도하거나 속일 수 없다. 오로지 주어진, 또는 선택한 플레이어블 캐릭터과 게임 시스템의 내적 한계 내에서 적절한 조작과 판단의 결과만을 반영할 수 있을 따름이다.


애런 도날드는 그의 압도적인 힘과 스피드로 더블 팀, 트리플 팀 블락을 뚫고 쌕, TFL을 따낼 수 있고, 게릿 콜, 제이콥 디그롬 같은 투수들은 무사만루의 불리한 상황에서도 100마일을 상회하는 하이 패스트볼로 타자를 압도할 수 있으며, 플로이드 메이웨더는 안면이 비는 로우 가드 스탠스로 상대의 공격을 이끌어 내면서도 정타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일방적인 공세를 이어나갈 수 있었지만, 게임에서는 어떤 위대한 게이머도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스펙, 캐릭터간의 상성, 게임 시스템의 한계를 초월하는 퍼포먼스를 낼 수 없다. 특정 스킬의 쿨다운을 임의로 없앨 수도, 불리한 상성 관계, 수적 열세를 초월하여 게이머 자신의 온전한 기량만으로 상대를 압도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해, 프로게이머에게는 주어진 상황, 스펙의 한계, 오판의 결과를 자신의 역량으로 극복할 수 있을 여지가 매우 제약되어 있다. 전성기 페이커도 이동기, 점멸이 다 빠진채 적 타워 앞에서 갱킹을 당하면 별 수 없이 죽어야 하고, 역대 최고의 철권 플레이어라는 무릎도 공중에 띄워지면 (상대가 조작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떠있는 동안에는 손도 못쓰고 맞아야만 한다. 게이머에게는 스킬마다 예외없이 책정된 쿨다운, 수적 열세에 대해 취약하게 설정된 캐릭터의 스펙, (격투 게임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공중에 떠있는 동안 어떠한 조작 입력도 게임 속에 반영할 수 없게 하는 따위의 일련의 체계적이고 극복할 수 없는 제약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스펙과 게임 시스템의 한계 안에서 자신의 역량을 제한적으로 체현하는 게이머는 오로지 빠르고 정확한 판단과 조작의 실행을 통해서만 자신의 기량을 행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지 못하면 그는 체계가 구획하는 한계 안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프로게이머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닥쳐온 상황에 가능한 한 빠르고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순발력, 반사 신경 작용과 주어진 제한적인 정보들을 즉각 취합하고 고려하여 다음의 상황을 예측하게 하는 추론 및 연산 능력, 또 일련의 조작을 취하고 있으면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적절히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멀티 태스크 수행 능력 등의 뇌 신경 기능들이 그 자신의 역량을 구성하는 전적인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이들 기능이 나이가 듦에 따라 쇠퇴하게 되면, 이러한 기능들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발현되는 게이머로서의 전면적인 역량 자체에도 심대한 타격이 가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능들은 육체 스포츠 종목에 종사하는 선수들에게도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다. 그러나 프로게이머들에게서만큼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육체 스포츠 선수들에게는 빠른 판단을 내리고 적절한 대응을 실행하는 자체만큼이나, '정확한 동작'의 수행이 선수 역량의 주요한 측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가령, 야구에서 타자는 단순히 투수가 던진 공에 대해 배트를 빠르게 휘두르기만 해서는 결코 타석에서 원하는 결과(안타, 사사구)를 얻어낼 수 없다. 타자는 투수가 던지는 백수십km를 상회하는 공에 대처할 수 있도록 고도의 기민함을 발휘 하면서도, 공의 궤적을 커버하면서 타구를 빠르고 멀리 보내기에 충분한 힘을 실을 수 있게 하는 스윙 메커니즘의 정교함,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에 힘을 쏟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지 못하는 선수는 아무리 눈이 좋고 육체적으로 기민해도 정작 공을 때려낼 수가 없다. 미식축구에서 쿼터백의 역량 또한 다운필드를 읽는 비전과 들고 있는 공을 어떻게 처분할지 판단하는 능력에만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플레이 콜의 최종 결정권자로서 전술가의 면모가 큰 포지션인 쿼터백은 그럼에도, 프레셔를 피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공을 들고 직접 뛰거나 목표한 리시버에게 공을 빠르고 정확하게 던질 수 있도록 매번 신체를 적절하게 조율하는 athlete으로서의 면모를 함께 함양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복싱, 킥복싱에서) 격투기 선수들의 경우, 피격 가능한 범위와 타이밍을 가능한 한 적게 노출하면서 상대방에게 충분한 타격을 가할 수 있게 하는 정확한 타격 동작을 습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련에 상당시간을 할애한다.


이처럼 육체 스포츠에서는 어떤 특정한 액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함에 있어 필요한 힘, 정확도, 기민함 등의 운동 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신체를 조율하는 구체적인 최적의 과정을 체화하고 그에 따라야 할 필요가 수반한다. 그러한 과정을 육체 스포츠 선수들은 오랜 기간동안의 반복 숙달을 통해 습득하고 상황에 구애받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운동 선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유소년 팀 등지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프로 운동 선수들의 최전성기가 대체로 신체 능력의 발달이 정점에 달하는 10대 후반, 20대 초반 사이가 아닌 그보다 다소 뒤늦은 시점에 도래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으로, 본격적으로 노화가 심화되는 시점에 이르기 까지는 이러한 운동 과정에 대한 숙련으로 순수 신체 기능의 쇠퇴를 벌충하고 심지어는 극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그러한 구체적인 운동, 행위 과정에 대한 숙련을 요구하지 않는다. 게임은 어떤 액션을 수행함에 있어, 단지 정확하고 빠른 조작 입력의 숙달만을 플레이어에게 요구한다. 게임에서는 투수의 피칭, 타자의 배팅, 무사의 일합, 프로 격투가의 킥, 펀치, 유술기와 같이 실제로는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이면서 구사하기 위해 오랜 기간 숙련을 요구하는 동작들이 단 몇 개의 조작키 입력만으로 일시에 '출력'된다. 그렇게 일련의 조작과 각개의 동작이 직접 대응하게 됨에 따라, 게이머는 그러한 동작 과정의 이면에 전제된 역학dynamics을 이해하거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신체의 가동, 상호 작용을 통해 체현하지 않고도 그것들을 게임 내에서 간단히 구사할 수 있다. 대부분의 프로 운동 선수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적어도 10년 이상의 훈련을 받으며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에 비해, 게이머가 비교적 짧은 훈련 기간만을 가지고도 프로 레벨의 역량을 함양할 수 있는 까닭은 그처럼 게이머에게는, 운동 선수의 경우와 같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동작 과정의 체화가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게이머의 역량 수준은 오로지 주어진 상황에 정확하고 빠른 조작 입력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의 여부로 결정된다. 그 밖에 게이머에게는 메커니즘이라는 측면에서 별도의 숙련 가능한 기능이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프로게이머는 베테랑 플레이어로서 노화에 잇따르는 신체, 뇌신경 기능의 감퇴를 벌충하고 극복할만한 어떤 숙련의 이점을 거의 가지지 못한다.


패치에 따라 시시각각 메타meta가 역동하는 게이밍 환경 역시 베테랑 게이머에게는 불리한 환경임이 틀림없다. 대개 육체 스포츠에서는 룰의 변경이 매우 보수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며, 각 포지션, 전술의 가치, 상성 관계의 변화 역시 (적어도 한 세대 안에서는)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예컨대 세이버 매트릭스의 발전과 스탯 캐스트의 등장, 수비 시프트의 가치의 재발견이라는 몇 가지 주요한 지형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년 전의 야구와 지금의 야구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야구에서 중시하는 기본은 같다. - 타자는 가능한 한 빠르고 멀리 투수가 던지는 공을 때려내어 득점 기회를 창출해야 하고, 투수는 그에 맞서, 수비하기 쉬운 약한 타구를 만들어내거나 타자를 압도하여 아웃 카운트를 따내야만 하는 것이다. - 그런 만큼 육체 스포츠에서 베테랑 플레이어는 오랜 현역 생활을 통해 축적한 자신의 경험치, 노하우를 활용하여 정확하고 지연없는 판단, 효율적인 움직임을 통해, 육체적, 운동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절정에 달해 있으나 경험 부족으로 비효율적인 동작의 구사와 오판을 거듭하기 마련인 신인들보다 나은 성적을 거둘 수도 있다. 데뷔 첫 해부터 팀에게 '중요한 순간을 맡길 만큼' 신뢰를 주는 신인은 오히려 드물다. 특히 포스트시즌 경기의 승부처 같은 상황에서는 현재 신인이 겪는 중에 있는 일련의 적응기를 이미 '졸업'한 베테랑의 활약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반면 짧은 주기의 패치가 아이템,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성능, 맵 디자인 등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메타가 격변하는 게임계의 환경은 경험과 노하우, 현상에 대한 적응에 기반한 베테랑의 가치를 상당부분 훼손한다. 개발진들의 독단에 의한 패치에 따라 일관된, 궁극적인 방향성 없이 시시각각 닥치는 (듯 보이는) 메타의 변화는 베테랑 플레이어가 지닌 경험을 세태에 부합하지 않는 구시대적인 것으로 간단히 전락시켜 그 가치를 무화한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메타의 등장에 맞추어 자신의 잠재력을 본격적으로 개화한 신인, 새로운 정보의 습득에 능숙한 젊은 선수들에게 도리어 베테랑을 피지컬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보적인 측면에서도 압도할 수 있는 이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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