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Writingonthewall Jan 11. 2022
영화의 주인공 리키는 택배 노동자이다. 그는 회사에 소속되어 매달 정해진 임금을 수령하는 월급 노동자가 아닌, 일종의 개인 사업자로서 ‘건당 수수료’의 형태로 임금을 지불받는 전형적인 긱 산업gig economy 종사자이다. 그의 아내 애비는 제로 아워 계약을 맺고 자신이 돌본 환자의 숫자만큼 수당을 받는 개인 요양사이다. 영화는 이 두 부부의 가정이 빠져드는 파탄 상황을 묘사함으로서, 이러한 산업 체계가 가진 착취적 면모를 조명하는 것에 주력한다.
리키는 매일 14시간씩 일주일에 6일을 일하지만, 그의 생활은 좀처럼 나아지지를 못한다. 회사 차량을 대여하여 일을 하는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리키에게는 아내의 승용차를 팔아 마련한 자신의 밴이 있지만, 그에게는 단 사흘동안의 휴가를 청구할 만큼의 자유도 주어져 있지 못하다. 그는 계속 일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대신에 일해줄 기사를 따로 고용하거나, 하루동안 일하지 않는 데서 발생하는 손실을 벌충하기 위해, 적지 않은 벌금을 지출하고 벌점을 부과받게 되기 때문이다. (벌점이 쌓이면 그는 직장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의 벌이는 순전히 그가 얼마나 많은 일을 실제로 처리하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일을 하는 날이 적어질 수록, 대체 기사를 고용하거나 벌금을 지불하면서 발생하는 비용과 더불어, 리키가 가정의 생계를 지탱하기는 어려워지게 된다. 고숙련 지적 노동과 저숙련 육체 노동의 양극화가 점차 심화되는 중에 있는, 현대 산업의 전반적인 현실 속에서, 리키 같은 저숙련 육체 노동자에게 선택지는 많이 주어져 있지도 못하다. 고용 안정성과 일정한 근로 복지가 보장된 저숙련 육체 노동 일자리는 오늘날 극히 드물고, 택배 운송 일처럼, 몸이 힘든 걸 감수하면서 고수입이나마 얻을 수 있는 직장조차 세상에는 많지 않다. 그것이 암울하고, 고되고, 적지 않은 경우에 모욕적인 일임을 알면서도 흔한 말로 ‘때려치지’ 못하는 데에는 그러한 사정이 있다.
그리하여 “열심히 일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권장 내지는 희망 사항은 사실상의 강압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고,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 이상의, 삶 전반을 옭아매는 것이 된다. 작중 리키는 일을 하느라 아들의 정학을 결정하는 교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아들이 물건을 훔쳐 부모의 방문 없이는 전과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경찰서로 출석하는 모습을 보인다. 엔딩에 이르러서는 불량배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심한 부상을 입고도, “죽을 수도 있다.”는 가족들의 만려를 뿌리치면서 까지 밴을 몰아 일터로 향한다. 아들의 학업, 미래, 가정의 안녕, 심지어는 자신의 신체, 생명에 대해서도 리키는 자신의 일을 우선하여 판단하는 수밖에는 없게 되버린 것이다.
리키의 개인 사업자 지위는 노동자에 대한 일련의 안전망, 복지 사항을 규정하는 노동법을 우회적으로 무력화하기 위해 기업이 마련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상술한 대로, 이는 그에게 ‘개인’이라는 표현이 함의하는 대로의, 일정한 자율이 주어짐을 의미하지 않는다. (리키는 자신의 딸을 자기 소유의 밴에 마음대로 태울 수도 없다!) 여기서 ‘개인’이란, 노동자에 대한 사측의 법적 책임이 존재하지 않거나 매우 미약하다는 사실, 즉, 노동자와 사측의 관계가 계약상의 원청과 하청의 관계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개인individual이라는 말 본연의 의미대로, 노동자가 일련의 보호적 체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는 명목상 회사에 고용된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법정 최장 노동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또한 과중한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사측으로부터 잔업, 초과 근무 수당을 지급받지도 못한다. 근무 중 발생하는 사고에 대해서도, 사측이 제공하는 보상의 범위는 제한적이다.
회사는 리키에게 일정량의 일을 일임하고, 그것을 정해진 방식으로 처리할 것을 지시한다. 그러한 지점에서, 회사와 노동자간의 계약상의 관계는 종료되고, 처리해야 할 일과 처리된 일에 대한 지불을 규정하는 상호의 책임만이 남는다. 이는 일견, 양측이 노사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조건에 동등하게 제약되는 공정 계약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거의 매일 14시간 가량의 노동을 요구하는 과중한 업무량과 특정한 화물을 특정한 시간대에 배송할 것을 요구하는(작중의 표현으로는 ‘정확 배송‘) 구체적인 지시 사항에 따라, 노동자가 자신의 업무에 관해 자율을 발휘할 가능성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반면, 다시 말해, 여전히 노동자가 회사가 일정하게 조직한 노동의 양상, 근로 계획에 종속되어 있는 반면, 회사는 자신이 그런 식으로 실질적으로 규율하고 있는 노동자들에 의해 어떠한 제약을 입지는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권리 없는 의무‘를 규정하는 노예 계약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근무중 불량배들에게 폭행을 당한 직후, 병원에서 진단 결과를 기다리면서, 리키는 택배사 지점장에게 전화를 통해 폭행 과정에서 파손된 스캐너와 분실된 여권값 도합 1500파운드를 지출해야 하고, 출근하기가 여의치 않다면 내일부터 대신해서 일할 기사를 구해야만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듣다 못한 애비는 남편의 휴대전화를 뺏어 그의 상사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주 6일, 하루 14시간씩 당신 위해서 일해요. 당신 밑에서요. 그게 어떻게 자영업이에요? he works for you, how’s that self-employ?”
장시간의, 타이트한, 타협의 여지없는 노동 일정은 물론 과로, 퇴행성 질병 등의 형태로, 노동자의 육체에 가장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 영향은 단순히 그러한 측면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단순하고 기계적인 양상의 노동, 기본적으로 몸이 성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형태의 노동은 그러한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 개인에게 허무감, 모멸감을 조장하고, 세인들에게서 경멸섞인 시선을 이끌어낸다. 누구나 몸을 갈아 넣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노동자, 쉽게 대체될 수 있는 노동자는 자신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적 생각을 하기가 어렵고, 세상 사람들의 존중을 받기도 어렵다. 리키가 작중 자신의 아들에게서 조차 그 노고를 인정받지 못하고, 경멸받는 모습은 이렇듯, 귀하고 천한 직업 간의 경계가 확고한 선으로 구획되어 있는 세태를 반영한다. 심지어, 리키 자신도, 아들과의 언쟁 중에 자신을 “하루 14시간씩 일하며 남 뒤치닥꺼리나 하는 종놈”이라 묘사한다. 이렇게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이러한 류의 열패감은 쉽게 떨쳐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작이 일종의 사회 고발 영화로서 가지는 울림과 생생함은 작중 리키라는 인물이 겪게 되는 불행과 불화가 일개 악덕 사업체의 비정상적 파행을 전제함으로서 가능해지는, 그저 ‘있을 법한’ 드라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 산업 체제에서 무수히 재현, 실현되고 있는 일련의 구조적 필연,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정상성에서 귀결될 수 있는 바라는 점에서 가능해진다. 요컨대, 작중 묘사되는 리키라는 인물의 상은 실제 긱 산업 노동자들이 받는 처우와 그들이 당면한 현실과 비교하여 볼때, 그다지 유별난 양상이 아니고, 그것이 어떤 사악한 개인, 사업체의 자의적, 탈법적 억압에 의해 초래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면에서, 리키라는 인물이 당면하게 되는 비극은 일련의 ‘악의없는’ 필요에 의해 불가피하게 조장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리키가 부담하는 과중한 업무량은 기업이 그를 의도적으로 혹사 시키기 위해 가중한 목표치를 설정하여 부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빠르고 정확한 배송에 대한 다량의 수요가 실제로 존재하고, 그에 부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일이 많으면 많은 만큼, 사람을 많이 써서 부담을 줄일 수도 있겠지만, 인건비가 늘어나는 상황을 달가워 할 기업은 없고, 그러한 결정을 기업에게 강권할 수도 없다. 한번 충원한 인원은 재차 감원하기도 어려우니, 기업 입장에선 더욱 꺼려진다. 정작 일하는 노동자들도 일이 줄어드는 만큼, 자신들의 봉급이 줄어들 터이니, 반가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다수의 긱 산업 노동자들은 애초에 혹사를 감수하고,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뛰어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각 노동자들을 직고용 하지 않고, 하청 노동자로 다루는 기업의 관행도, 그러한 직업이 안정된 고용을 요할 만큼, 일정 이상의 숙련도와 작업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반면, 직접 고용에 잇따르는 유무형의 리스크(고용 보험, 사내 복지에 잇따르는 지출, 퇴직금, 노사 합의 등)가 기업의 입장에서 적지 않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즉, 이와 같이 문제적이라 할 수 있는 현상들 가운데에서, 어떤 특정한 악의적 주체의 음모가 작용하고 있지는 않다. 단지, 시장에 참여하는 각 주체의 필요와 욕구에 따른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에 관련한 어느 누구도, 일부러 다른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일을 꾸미고 있지는 않다. 단지 무수히 많은 고객들이 빠르고 정확한 배송을 요구하고, 기업은 고용에 잇따르는 리스크를 회피하려 하고, 노동자는 그렇게 조성된 열악한 근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직장을 필요로 할 따름이다. 만일 모든 문제가 몇 개의 특정한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교정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실제로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현실의 무수히 많은 ’리키‘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개의 두드러지는 결함을 교정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보다는 훨씬 근본적, 구조적 차원에서의 개혁이 필요하다. 문제가 크고 추상적인 만큼, 여러 주체의 상충되는 이해 관계가 관여하는 만큼, 자연히 그 해결은 까다롭고, 요원한 것일 수밖에 없다. 영화 속 리키의 이야기가 절망속의 체념으로 치닫게 되는 건, 영화 바깥의 현실에서 사는 우리로서도, 그를 구제할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처한 현실이 곧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