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과하게 밝고 투명한 것

by Writingonthewall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제목은 ’숨김없이 발가벗겨진 연애‘와 같은 의미인 것으로 여겨진다. ’한낮‘은 하루중에 가장 밝은 시간, 곧 드리워지는 그림자 이외에 지상의 모든 것들이 태양빛 아래에서 숨김없이 노출되는 시간을 의미한다. 빛은 ’살아있음’이 가져다 주는 영광됨, 죽음과 대비되는 어떤 것, 암흑이 추방된 상태, 그 밖에 삶의 여러 밝고 긍정적인 부분을 표상하는 상징으로서 자주 차용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 그 지나친, 더해질 것이 없는 밝음으로 말미암아 문제시되는 것이기도 하다.


어둠은 근원적으로 그 외부의 것들에 대해 ‘닫혀있는‘ 것이며, 부정형의 상태이다. 어둠은 밀실의 폐쇄성, 광원이 소거되거나 가려진 상태, 우리의 시각으로부터 은폐되고 유무형의 감시에서 멀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이 인지하고 처리하는 정보의 80퍼센트 이상은 시각을 통해 취해지는 것들에 기인하는데, 어둠은 필연적으로, 그러한 인간의 인지 능력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므로, 인간은 어둠을 두려워 하고 회피하도록 진화했다. 침대 밑, 벽장 속, 우거진 풀숲과 같은 공간은 인간으로 하여금, 거기에 부기맨이나 맹수가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두려워 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빛이 드리워지지 않고 따라서 그 안에 감춰져 있는 (있을지도 모를) 것들이 공개되지 않는채로, 계속 감춰져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어둠은 인간이 어떤 것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알지 못하면, 인간은 미지에 잠재된 위협에 대비할 수 없는데다, 위험한 것들 가운데에는 실제로 야행성의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흔히 ’밤길을 주의하라‘고 말하는 건, 밤길에는 어둠을 틈타 야습을 노리는 강도나 살인마가 있을 수 있고 정말로 그러한 위협이 닥치기 전까지는 그에 대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춰진다는 것이 언제나 인간에게 해로운 것은 아니다. 어둠에는 인간이 자신만의 비밀을 가질 수 있게 돕는 측면도 있다. 어둠의 닫힌 속성은 무엇이든 편견없이 그 안에서 머물며, 은신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거의 모든 비밀스러운 계획은 야간에, 또는 폐쇄된 밀실에서 꾸며진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 일탈도 대개 야간과 밀실을 배경으로 성립된다. 닫혀 있다는 것, 감춰져 있다는 건 한편으로, 발각되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빛을 선호하지만, 동시에, 드러내지 않고 감춰두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어둠은 그런 의미에서 욕망의 소도蘇塗, 성전, 은신처일 수 있다.


빛은 그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발각시킨다. 빛은 외부의 모든 것을 향해 열려있는 긍정형의 것이다. 빛은 무엇도 감추지 않고 해명한다. 어둠이 무지라면, 빛은 이지를 상징한다. 예컨대 절대 이지의 존재인 신은 감히 직시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휘광에 휩싸여 있는 것으로, 그의 사도에 해당하는 성인들은 후광을 뒤집어 쓰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빛 아래에선 비밀이 없다. 음모가 없고 잠재된 위협도 없다. 백주, 대낮이라는 말의 뉘앙스를 생각해 보라. 대낮에 무슨 변고가 있었다는 진술은 자체로 어떤 이상성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사고는 어두운 때에 일어나지, 대낮에는 그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은 보통 모든 것이 어둠안에 숨어, 감시가 헐거워지는 한밤중에 일어난다. 보는 사람이 없고, 잘못된 행동에 대한 처벌도 없으면,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반면, 밝은 대낮은 그 아래에서 감춰질게 없다고 생각되므로, 사람들은 외부의 감시를 내면화하는 채로 행동하게 된다. 존재로서의 내가 아닌, 남이 보는 나의 모습으로 행동하게 된다.


‘밝음’의 문제는 그렇듯, 그 아래에서는 감출 것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대낮에는 비밀스런 욕망이 실현되기 어렵고, 태양빛이 미치는 열린 공간에서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 어렵다. 남들의 앞에서 자신의 행위의 궤적이 숨길 것 없이 드러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빛은 인간 존재를 가릴 것 없이 발가벗기고 탄로낸다. 휘광 너머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신의 눈을, 그의 미약한 창조물들로서는 속일 방법이 없다. 태양은 이미 인간이 그 아래에서 저지르는 모든 것을 보아 알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인간은 그의 죄가 인간 사회에서의 처벌을 받았는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의 죄를 신의 앞에서, 또는 그의 사도 앞에서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고해성사)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제목은 그러한 빛의 속성에 비추어, ‘너무 밝다’는 의미인 것이다. 연애란 (주로 연인 양자간의) 사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고, 사적인 관계에는 어느정도의 ‘비밀’이 깃들어 있어야 적절한 긴장감이 유지될 수 있다. 즉, 서로가 보지 못하는 ‘어둠’이 있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라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 알지 못한 것을 서로 나누고 알아가는 과정인데, 서로의 모든 것을 미리부터 탄로낸채 시작되고 지속되는 관계는 이미 교류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에서의 양자는, 이미 서로 섞고 나눌 것이 따로 없을 정도로, 동질의 인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는 단지 관성으로 이어지는, 미지근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양자의 동질성은 관계의 유지를 위한 동력의 하나일 수는 있어도, 양자간의 ‘어긋남’만큼 결정적인 팩터는 아니다. 대부분의 연애 관계가 이성heterosex 관계인 것은 서로간에 뚜렷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작중의 두 남녀 주인공, 양희와 필용의 관계는 그런 미지근한, ‘밝음’만이 있는 관계이다. 필용은 양희를 “그렇게 부끄러워하지도 뭔가를 숨기려 들지도 않는 사람은 없었다.”고 묘사한다. 그러한 필용의 진술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필용이, 양희가 자신에게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다. 필용은 그런 가능성 자체를, 적어도 당시로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즉, 필용은 양희를, 숨길 것 없이 탄로내어진 인간이라 간주하고 있었다.


양희 역시, 필용에 대해 아무런 의심이나 의문을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양희는 필용의 말을 잔잔한 호수처럼 가만히 듣고 있었고 시선도 늘 부담스럽지 않게 필용을 비껴 있었다.” 필용은 그런 양희에게 “들킬까 안 들킬까 걱정할 필요도 없이 마음껏 자기 얘기를 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양희 역시, 필용을 더 드러낼 것 없이 탄로낸 인간으로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둘의 관계는 피상을 맴돌았다. 둘이 ” 밤늦게까지 함께 있는 날은 없었다.”, “그런 일과들은 늦어도 대여섯 시에 끝났고 그쯤 되면 지루하고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의 내밀한 내면을 나누려 하지 않았다. 해가 지고 밤이 오기 전에, 태양 아래에서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알만한 것들’을 관습적으로 훑었을 뿐이다.


필용이 보여달라고 하면 아무 말 없이 건네서 보여줬다던, (필용의 표현에 따르면) ‘더럽게도 재미없는 대본‘은 그러한 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대본 속의 두 남녀 주인공은 ’양희처럼 희미하고 몽롱한‘ 이름인데다가 이름도 없다. 남자 1과 여자 1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이다. 내용 면에서는 사건이랄 것도 없이, 어느 한 쪽이 섬으로 휴가를 간다던가, 개를 잃어버렸다던가, 술을 마신다던가 하는 일들에 대해 말하면, 다른 한 사람은 그에 대답하고 수긍하기만 한다고, 필용의 입을 빌려 묘사된다. 제목도 무언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나무는 크크크하고 웃지 않는다.‘니, 나무는 당연히 크크크하고 웃지 못하는 거 아닌가? 크크크하고 웃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일체의 말을 하지 못한다.


필용과 양희의 관계도 그렇다. 필용이 떠들면 양희는 ’잔잔한 호수처럼’ 가만히 듣고만 있는다. ‘더럽게도 재미없는 대본‘처럼, ’더럽게도 재미없는‘ 관계이다. 양희는 그런 ‘더럽게도 재미없는’ 대본을 굳이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필용도 양희의 대본에 대해 자신의 감상을 표현한 적은 없는 모양이다. 사건없이 평이하게 흐르는 대본처럼, 둘의 관계 역시 그저, 흐를 뿐이다.


둘의 관계가 연인으로 발전한 계기 또한, 사건이라 말하기는 미묘한 것이다. 둘의 연인 관계는 양희의 느닷없으며, 건조하기 그지없는 사랑 고백으로 시작된다. 양희는 그 날, 일말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고, 돈을 쥐어주며 햄버거 주문을 부탁하던 때와 다름없는 톤으로, “나 선배 사랑하는데.”라고 고백을 한다. 필용이 사랑하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양희는 “그런 걸 뭣 하러 생각”하냐고 말한다. 그것을 사건이라 부를 수 있다면, 순전히, 고백을 들은 필용 측의 심리적 동요에 한하여서만 그러하다. 필용은 양희를 어느 면에서도 자신의 이상형이라 판단할 수 없고, 양희와의 관계에 절박함을 느낀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어쨌든 둘은 그렇게 ‘연인‘이라 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 거기에 이유랄게 있다면, 기존에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데다, 그러던 참에 양희가 고백을 했다는 것. 단지 그뿐이다. 타오르는 감정의 격류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런 양희의 고백은, 물론 별다른 고민없이 말해진 것이다. 필용에게 본인이 직접 해명했듯이, 단지 지금 좋아한다고 생각이 드니까 말했을 뿐이고, 그 감정이 당장 내일에도 지속될지,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지 못한채, 말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 고백’이라기엔, 단지 그 당시의 관계에 대한 의식적 확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을 자신에 대한 희롱이라 여겨, 밖으로 나가는 필용을, 양희는 붙잡지도 않았다. 그만큼 필용과의 관계는 양희에게도 그다지 절박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둘의 관계의 양상은 그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양희가 돈을 건내주면, 필용은 대신 햄버거를 주문해준다. 필용이 말을 하면, 양희는 그걸 그냥 듣고만 있는다.


필용은 다음날 양희에게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양희는 무심하게 오늘도 사랑한다고 대답한다. 필용은 그 대답에 안도와 기쁨을 느끼지만, 그 대답은 단지 말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필용이 4장에서 양희와의 연애를 형용하는 대목을 읽어보면, 필용도 그 대답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연애는 아니더라도 연애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던 사람”, 즉, 양희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필용은 그러한 관계를 뚜렷하게, 연애라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5장에서 필용이 그 이후, 양희와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식의 묘사가 나오지만, 그러한 ‘동요’는 둘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기 보다 역설적으로, 둘의 관계와 감정의 기반이 그만큼 불안정한 것이었음을 나타낸다. 양희는 그 이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대본을 썼고 옷차림이나 머리 몽양도 그대로였고 흩어지는 공허를 통해 아우라를 유지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장마가 시작될 무렵, 양희는 필용에게 더 이상 필용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을 당시와 마찬가지로 급작스럽게 말한다. 필용이 매일같이 물으면 확인해주던 사랑의 감정이 그 날 갑자기 없어졌다고 말한다. 당황한 필용은 그런 감정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전만큼은 아니게 시들해진 것일 뿐이라며 반론을 펴지만, 양희의 동의를 얻지는 못한다. 사랑의 감정이었다면, 확실히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양희 본인의 감정은 그렇게 급격한 결말을 맞을 수 있을 정도의 층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사랑이었으면 그렇게 쉽게 시작되지도 않았을 거고, 셀레브레이션이 없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해 아래 드러나는, 겉보기로 확인할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감정이었을 따름이다.


필용은 양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칭찬을 늘어놓으나, 그럼에도 양희의 태도가 변하지는 않자, 생각을 바꿔 그녀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같이 다니면 낯 뜨거우니 꾸미고 다니라고, 꿈을 좇는건 좋으나 밥벌이는 하고 다니라고, 그동안 얻어먹은 돈 갚으라고. 양희는 그러한 필용의 발언에 충격을 받아, 함께 다니던 학원을 끊고 필용의 곁을 떠난다. 필용은 양희가 떠났음에 충격을 받아 고열에 시달리며 앓아 눕는다.


필용은 어째서 하루아침에 사랑이 없어졌다는 양희의 말에 상처를 입을 정도로, 그녀와의 관계에 진심이었나. 맥도날드에서 함께 하는 식사 이외에, 그들이 연인으로서 갖는 의식ritual이랄 게 있었던가. 둘의 관계는 ‘말’로서 떠도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었다. 둘의 사랑은 필용의 질문과 양희의 대답으로서만 확인되는 것이었는데, 무엇이 그를 그 이상으로 얽매이게 하였나.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관찰하기 어려운 사례이므로 무어라 확답하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추측하자면, 필용은, 그가 그때까지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그러한 양희와의 문답 뿐이었으므로, 연애 관계의 본질을 고작 말뿐인 것에서도 온전히 추출해낼 수 있을 거라, 무의식적으로 결론 내린 것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사랑’이라는 말의, ‘로고스‘로서의 힘에 설복 당하고 만 것이다. 말이 관념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고 계속 되새겨진 끝에, 필용은 그것만으로 충분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체감하게 된 것이다. 말은 기본적으로, 의식consciousness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때로 말의 의미나 뉘앙스가 역으로 의식에 투영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호모, 니그로 같은 일련의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어휘들을 gay, queer, african american 등의 중립적인 어휘로 교체하고자 하는 언어순화euphemism 운동은 통상, 사람들간의 합의로서 의미가 규정되는 언어가 역으로 사람들의 사고를 규정할 수 있다는, 그러한 전제(이른바 사피어-워프 가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성 사이에 성적인 뉘앙스가 없는, ‘그냥 친구’는 있을 수 없다는 세간의 속설도 필용의 태도 변화를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된다. 여러 일상적인 경험으로부터 귀납해낼 수 있듯이, 이성간의 친밀한 관계에서는, 관계가 길어질 수록 상대방의 성적 매력에 대한 평가가 과대해지는 경우가 많다. 결국 상대의 성적 매력도가 평균보다 한참 뒤떨어지는게 아니라면,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필용도 처음에는 양희를 연인으로서 높게 평가하지 않았지만,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서 ‘친근함’을 ‘사랑’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어느 쪽이든, 혹은 두 경우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든 간에, 머리가 정념에 오염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종의 착오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양희와의 연애는 필용에게 낯뜨거운 일이다. 그는 작중에서 내내,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사랑이란 본래 만인 앞에서 떳떳하기만한 감정은 아니지만, 필용은 특히나 자신이 양희에게 희롱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리고 명목상 일단은 연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 동요가 드러나고 있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해 하는 모습을 보인다. (“필용은 태연을 연기하면서도 어떤 기쁨, 대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불가해한 기쁨이었다.”)


필용은 양희의 감정 조절 능력, 그리고 절제된 표현 능력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말뿐인 사랑을 표현하는 양희에 대응하여 필용 또한 그의 진심을 양희에게 표현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양희에게 대답을 받으면서 느끼는 기쁨을, ‘불가해한 기쁨‘이라 말하고 있는데, 사실 여러 정황을 참조해 보면, 그 기쁨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기는 어렵지 않다. 사랑을 확인받으며 기뻐한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말뿐인 것이라도) 그가 양희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의미 밖에는 안되지 않는가.


그럼에도 필용이 그것을 ‘불가해한 기쁨‘이라 말하는 것은, 사실은 알면서도 그것을 명시적으로 스스로에게 해명하고 싶지는 않을 뿐인 것이다.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제목의 미묘한 뉘앙스는 그러한 맥락에서도 성립된다. 필용은 양희와의 연애사를 독자들에게 누설하면서 자신이 긍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을 은연중에 스스로 탄로내는 듯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대낮의 밝은 해 아래에서 피할 곳을 찾지 못하고 그 눈부신 밝음에 의해 불가피하게, 발가벗겨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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