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Writingonthewall Jul 30. 2022
과연 그렇게 간단한 이치일까.
논쟁적인 사안에 대한 견해를 밝힐때, 어떤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일뿐"이라는 단서를 덧붙이며 단언하기를 꺼려한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아가, "반박시 네가 맞음"이라며 미리 예상되는 반론에 대해 항복 의사를 밝히면서 노골적으로 추후의 논란을 기피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이러한 태도는 둘 중 한 가지의 이유에서 비롯하는데, 하나는 사안 자체가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이어서 '개인적인 견해'들 간의 객관적인 차등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이거나, 또는 단순히 그 개인이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 단언할 만큼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경우이다. 어느 쪽이든 이처럼 자기 불확신의 제스처를 동반한 견해의 표명은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 것이다.
전자의 경우, 구태여 조심스러워 하지 않아도 개인적인 견해의 장에서 발표되는 '개인적인 의견'이 객관적, 보편적 차원에서의 타당성, 합리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말 그대로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바로 그러한 담론과 표명되는 견해 자체의 속성에 의해 다른 모두에게 주지되는 바이다. 즉, '동어반복'을 할 이유가 없다. 가령, 어떤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어떤 이유로 좋아하는지 밝히는 데에, 그런 생각이 하나의 개인적 취향에 지나지 않는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게 달리 무엇이겠는가.)
후자의 경우, 자기의 주장에 대해 확신을 구할 만큼 충분한 검토와 숙고를 거치지 못했고, 그리하여 예상되는 반론들로 부터 자기의 주관을 변호할 자신도, 역량도 갖추지 못했다면 애초에 공연히 자기의 주관을 밝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공개된 공론장에서 차이를 지닌 견해를 밝히면 자연히, 그리고 불가피하게 그에 대한 반론이 잇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게 두렵고 그에 대처할 자신도 없으면 뭐 하러 말을 하는가. 애초에 말을 하지 않으면, 그런 걱정을 할 이유도 없을텐데 말이다. 바로 이후에 이어질 일도 내다보지 못했거나 선택에 잇따를 결과를 알면서도 기피하고자 하는 고난을 되려 자초하는 것이나 어리석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사실은 두 경우 모두에 있어서, '개인의 견해일 뿐'이라는 해명 자체가 일종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당연히 각개의 의견은 어떤 개인에 의해 그가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 바를 따라 '개인적으로' 표명되는 이상, (충분히 많은 다수에 의해 지지되는 가설, 내지는 정설인 경우에도) 하나의 개인적인 의견인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자명한, 견해의 개인적인 측면은 그러한 사실 자체 이외에, 요청되는 '면책'에 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또한 일종의 자비를 요청하는 표현의 형식적인 측면과는 무관하게 그러한 해명에 실질적으로 잇따르는 것은 일체의 반발에 대한 나태와 경멸의 제스처 섞인 무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일방적인 선언에 그치는데, 이처럼 남이 들을 것을 전제하고 자기의 말을 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 양상은 오늘날 만연하는 집단적 독백의 경향, 자폐적 의사pseudo- 소통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이때 발화는 의미 교환의 매개라는 본연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단지 원하는 리액션을 이끌어내기 위한 무의식적인 신호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실 그런 항복 의사 표현은 추후의 분란을 예방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도 못한다. 어쨌든 자기 주장을 하면서 타인과의 어떤 기질적인 상이함을 드러내는 이상, 분쟁의 소지는 언제나 존재한다. 개인적인 차이를 드러낸다는 건 단순히 어떤 객관적인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구획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에 대해 상충하고 대립하는 측면을 드러냄으로서 타인이 형성한 가치 체계에 있어서 위배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각개의 입장이 지니는 개별적인 정당성과 그것을 구성하는 논거는 하나의 '유일한' 정상성으로 가정되는 가치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 자체의 체계 내적인 위상은 외부의 위배 사항, 비-정상성에 대한 지속적인 교정, 불관용의 경향으로서 지지된다. 즉, 사물이 고립된 그 자체의 실체로서가 아닌 다른 것들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구분을 획득하듯이, 각개의 입장은 그것이 전제하는 사항들에서 연역되는 적대적 관계의 망 안에서 실질적으로 유효한 것일 수 있다.
바꿔 말해, 다른 것들과의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개별성의 요건을 구성하는 차이의 배타적 형식은 타자에 대한 부정, 객관적 우월의 강조로서 기능하는 자체의 내적 당위와 논리에 의해 필연적으로 외부와의 불화를 빚어내는 것이다.
하나의 주장은 그것이 어떤 현상, 사실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에 해당한다는 배타적인 정합성의 차원에서 성립한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거나 적어도 (심지어 스스로 확신이 없는 경우에도) 현재로서는 가장 최적의 가설이라고 생각하니까 주장을 하지, 자신의 견해가 명백히 사실에 위배된다고, 일말의 사실일 가능성조차 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진지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하나의 주장은 다른 것들과의 (잠재적인) 비교로 성립하는 경쟁적인 우열의 체계를 전제함으로서 표명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반된 입장은 하나의 장sphere내에서 공존할 수 없고, 논쟁은 가장 건설적인 경우에도, 일정 부분 분쟁의 속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호의 상반된 입장, 차이에 대한 용인은 결국 자신이 가진 (나름대로의 가중치를 부여한) 전제에 대한 부정, 약화, 끝내는 그 자체의 소실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가령, 유신론자가 무신론자에 대해 관용을 베풀기 위해선 신의 존재와 모든 도덕적 기준의 최종심급으로서의 신의 위대함을 부정하는 무신론의 입장을 긍정하거나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내지는 일말의 진실을 포착하고 있음으로서 획득되는 유의미한 견해로서의 가치를 상정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는 그가 가진 초월적 절대자에 대한 신앙을 자발적으로 약화시키는 일일 수밖에 없다. (이는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유신론자는 적어도 그 자신의 신앙이 관계하는 신학적 분야에 한해서는 반대되는 견해, '이단'에 대해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가질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믿음을 지탱하는 논거들은 그에 대한 반론과 잠재적인 침해에 대응하지 않는다는(그런데 '그러지 않는 것'은 '그렇지 못한다'는 불능성과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못한다.) 사실에 의해 머지않아 그 지위가 의심스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가치관, 의견을 지닌다는 건 이처럼 일련의 배타적 전제에 기반을 둔 자기의 믿음을 보존하기 위해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 (자신의 가치관이 관계하는 측면에 있어서의) 보편적 정상성, 사실에 있어서 전적이고 최적화된 설명으로서의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릇 무언가를 주장한다는 건 언제나 자기의 옳음을 오만에 가까운 확신과 더불어 강변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럼으로서 주장은 비로소 본연의 경쟁적인 측면을 발휘하고 공론에서 하나의 대항하는 견해로서 유효한 것일 수 있다. 적어도 그러한 의견은 (자명하게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에도) 듣는 이의 파토스pathos를 흔드는 하나의 호소일 수는 있다. 반면 확신이 동반되지 않고 그리하여 누구도 설복시킬 수 없는 의견, 어느 것도 적대하지 않으며 투쟁을 불사하면서까지 보존되어야 할 고유함을 가지지 않는 차이는 잠재적으로 자신의 어떠한 지향도 외부에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 유효한 것일 수가 없다. 그것은 말해지지만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매번 스스로 철회되는 공허한 되뇌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