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Writingonthewall Feb 25. 2022
오늘날 맹목적인 자아 긍정이 만연하다. 오늘날 만연하는 자기애는 상호간에 베풀어지는 애정이나 객관적으로 검정될 수 있는 미덕virtue에 근거하여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의 관대한 시선 아래, '나다움being myself'이라는 규정을 통해 형성된다. 적지 않은 이들에게 건강한 자존감의 근거로서 오인되고 인용되고 있는 나다움이란 기실 실체없는 동어반복적 규정에 불과한 것으로 자아에 대한 한도없는 관용과 자아의 비대화를 초래한다. 그것은 각자의 실존, 고유함 자체를 궁극적으로 이상화idealize함으로서 아무런 노고없이 저절로 충족되는 만족, 맹목적인 자기애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지금의 자신인 그대로 있음으로서 성립하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사로잡힌 인간, 불만을 모르고 항시 만족을 느끼는 인간은 제 자리에 머물다 못해, 결국 자신의 수족을 다루는 기술과 힘을 잃어버리고 한없는 퇴행을 향해 수축할 수밖에 없다. 오로지 지금의 상태에 불만을 느끼고 위를 올려다 보며 발버둥치는 인간만이 자기 자신을 활용하고 숙련한 끝에 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 자가 충족적인, 그리하여 앞으로 나아가야만 할 이유를 빼앗는 나다움의 이상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개인을 구속시키며 퇴행을 조장한다.
'나다움'에의 추구는 기성의 자신에 대한 천착에 지나지 않는다. 나다운 존재,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각자는 자기 자신인 채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저 존재함으로서 이미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각자는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한 나다움이라는 목표에는 어떠한 개선의 여지가 없을 뿐더러, 지금 있는 그대로인 채로 머무는 게으른 실존이 적극적으로 용인된다. 그렇게 그저 존재함으로서 어떤 인간적 완성을 추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유아적이다 못해 병적인 믿음이다. 누구나 나름대로의 자신다움, 고유한 측면을 보유하고는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에는 어떤 추구할만한 신성도, 가치도 없다. 누구나 공유하고 있는 특질은 특질이라 할 수 없다. 자기 자존의 근거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인 개체로서의 개별성에만 기대어 있는 인간은 그러한 구분만을 유효한 것으로 지니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자신다움'이 그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지는 않는다. 자신다움만을 지닌 인간은 이름없는 구분만을 지니는 아무개에 불과하다.
최근 패션, 모델 업계에서 일고 있는 몸 긍정body positive 운동은 그러한 병적 자기 긍정의 두드러지는 증상 중 하나이다. 비만형의, 흉측한 체형의 몸을 자신의 일부라는 이유로 옹호하다 못해, (엄청난 노고를 기울인 끝에 만들어져 유지되는) 잘 가꾸어진 전형적인 모델 체형의 몸을 비하하기에 열성을 쏟는 몸 긍정 운동가들의 행태는 자아에 몰두한 끝에 퇴행하는 인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성취하지 못함으로서 비롯하는 열등감을 성취의 가능성, 대상 자체를 소거함으로서 극복하고자 한다. 그 자신을 일종의 개발 대상으로 간주하게 되면, 성취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거나 성취를 향해 상당한 노고를 투자해야 할 필요에 쫓기게 되므로 그들은 현재 자신의 몸을 유일한 가능성, 정상성으로 설정함으로서 자기 자신을 반복해도 좋을 당위를 구축하기에 몰두한다. 그에 따르면 태만한 식습관, 생활을 지속함으로서, 그때 그때의 욕구에 순응함으로서 만들어진 비만형의 몸이야 말로, 충분한 절제와 규율을 통해 잘 가꾸어진 몸에 비해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아름다운 것이다.
낙오를 피하기 위해 성취를 거부하는 이와 같은 역설은 외부의 선호, 내지는 압력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본연의 자신을 반영하는 것이 진정 가치있는 것이라는 이상화된 자아에 대한 신앙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의도된 가치의 역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몸의 추악함은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잘 가꾸어진 몸의 아름다움 역시, 그 가장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퇴색되지 않는다. 캔디스 스와네포엘과 아드리아나 리마의 글래머러스한 육체미가 변함없이, 그리고 당연하게도 온 몸 구석구석 종양같은 지방 덩어리를 달고 있는 몸 긍정 운동가들에 대해 우위를 점한다. 자아의 진정성을 선전하는 '본연의' 꾸며지지 않은 몸은 그 미감없는 형상으로 말미암아 정작 자아의 가치를 증명해내지 못한다. 오히려 흉측한 몸에 반영된, 태만하며 절제를 모르는 원초적 자아의 진정성은 볼품없는 몸에의 투영을 통해 자신의 추악함마저도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상식적인 앎과 교양을 거부하는 반지성주의의 유행 역시, 오늘날 만연하는 자의식의 비대화와 무관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배움을 추구하고 무언가에 대해 사유하는 데에는 상당한 인지 자원의 투자가 요구된다. 그리고 앎과 교양에 관한 내재적인 상승 욕구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핍을 지각하는 고통스러운 객관화의 과정을 수반하게 된다. 스스로가 무식하다는,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자각은 누구에게나 달갑지 않다. 그러한 자각은 개인에게 모멸감을 가져다 주고, 잇따라 스스로를 힘들여 개발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한다.
자신다움, 진정성에 대한 신화는 그에 비해 훨씬 간단한 솔루션을 제공한다. 개인을 모든 노고에 앞서 단순히 그 자신으로 있음으로서, 이미 완성된 존재로 간주하는 본연의 나다움, 진정성의 이상은 앎과 사유를 구태여 불필요하게 덧붙여지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전락 시킨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먹고 사는데 지장 없으니 알 필요없다."는 무식자들의 항변은 살아있는 한 나 자신일 수 있으므로, 그 이상 추구할 게 없으므로 몰라도 된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처럼 나다움의 이상은 단순한 생존 이상의 추구를 함축하는 일련의 가치들을 삶의 부가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먹고 사는' 문제, 삶을 '지탱'하는 데에 영향을 끼치는 것만이 중요하고 진지하게 다룰만한 문제가 된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삶은 하나의 생존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된다. '나다움'에 만족하는, 나르시시즘에 도취된 자아는 오로지 생존 자체와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만을 느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