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물은 주로 두 가지의 상징하는 바를 가진다. 하나는 고대 그리스-로마, 이집트 신화 등의 많은 창세 신화에서 보여지는, 생명, 만물을 잉태하는 바다의 이미지로 표상되는 잠재된 창조성, 생명력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의 ‘노아의 방주‘ 파트를 위시한 대홍수 설화들에서 보여지는, 타락한 세상의 표면을 남김없이 쓸어 없애며 정화의 기능을 표시하는, 천형天刑으로의 것이다. 하지만 <물 속 골리앗>에서 나오는 ’물‘의 의미는 어느 쪽의 전형에도 적확히 부합하지는 않는다. 굳이 어느 쪽에 가깝다고 말해야 한다면 후자에 가깝지만, 정화의 기능을 하는 천벌이라기 보단, 맹목적인 파괴를 수행하는 단순한 대재난, 인간이 감히 대항할 수 없는 불가피한 비극의 표상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아와 우트나피쉬팀은 대홍수가 닥치기 이전에 미리 신격의 계시를 받아 방주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물밑으로 가라앉는 대재난을, 이후의 물의 신벌로서 정화된 세계에 정착하여 이전의 타락한 세계로 부터 스스로를 구원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물 속 골리앗에서의 홍수는 애초에 어느 누군가가 세계 정화라는 필요에 따라 의도한 결과가 아니며, 몸에 붙은 오물들을 털어 내려는 가이아의 자정 현상 또한 아니다. (인류의 어떤 치명적인 실책, 대죄로 야기된 것인지도, 작품상의 맥락만으로는 불분명하다. 소설 외적으로 지구온난화, 기후 변화가 문제가 되고 있으니, 그런 방향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영향은 비선택적으로 끼쳐지며, 미연에 어떤 뚜렷한 징조나 계시를 내비치지도 않는다. 그래서 홍수는 두 모자에게 구원의 계기가 되지 못한다. 그러기는 커녕 홍수는 그들의 남편이자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기조를 이어서 둘을 또 다른 형태의 궁지로 몰아넣는다. 물은 말없이, 무심하게 제 몸에 닿는 것들을 곤란에 빠뜨린다.
소년은 소설의 끝에 이르러서도 아직 죽지 않으나, 그건 물이 강제 이주 대상 철거민이자 일찍이 아버지를 여윈 소년의 처지를 연민하여 자비를 베푼 덕도, 다가올 재해를 미리 예측한 소년이 그에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다. 순전히 그와 그의 가족들이 물이 일찍 미치지는 않는 높이의 아파트에 살아서 대처할 시간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수영을 배우기는 했지만, 온 지상이 바다가 되어버린 시점에서 그게 썩 유용한 기술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예 맥주병인 것보다는 나을테지만 말이다.) 작가는 소년이 아버지에게 수영을 배운 일화를 소개하면서 세상의 압박에 매몰되지 않고 이겨나가려 하는 주체성, 능동의 가치를 은근히 독자들에게 주지 시키려하나, 그를 작중에서 대변하는 수영이라는 기술이 작중에서 난관을 헤쳐나가는데 뚜렷한 효용을 보인 바가 없을 뿐더러, 소년의 생존 자체가 구체적인 지향을 가진 행동에 따른 것이 아닌, 그저 생존에의 발악과 요행에 이어진 것일 뿐이라 설득력은 없다. 살기 위한 몸부림은 어떤 면에서는 외부적 자극에 따르는 피동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소년은 “누군가 올 거”라는 희망을 말한다. 아버지가 떨어져 죽은 골리앗 크레인만이 부유하고 있는 세상속에서, 그러한 희망에는 사실 기약이랄게 없다. 주인공 가족, 소시민들을 억누르던 부조리한 현실이 물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지만, 세상은 그런 식으로 ‘정화’된게 아니라, 불의의 재난으로 멸망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노아와 우트나피쉬팀이 사전에 구원을 약속받은 것에 반해, 소년은 별안간 무차별적 파괴, 망망대해의 한 가운데에 놓여 약속되지 못한, 어딘가에 있기는 한 것인지도 모르는 구원을 알아서 구해야만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배를 대신한 방문짝 하나에만 의존하는 채로) 더군다나 재난이 그만 거기서 끝나게 되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 ‘지구는 정신병에 걸린 걸지도 모른다.’ - 그것은 어떤 의도나 실책, 대죄와는 무관한 자연의 작용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한달이 넘도록 지속된 이상 기후는 아마도 이른 시일내에 교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각地角의 느릿한 거동에서 알려지는 것처럼,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에 성급함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하여, 골리앗(크레인)은 물 위에 서있지만, 다윗이어야 할 소년은 다윗이 아니다. 소년은 골리앗을 쓰러뜨리지 못하고, 되려 골리앗의 위에서, 그에게 생을 빌붙는다. 해당 상징은 기반을 잃어 공허해지고 만다.
체불 임금 노동자, 재개발 지구 철거민, 유약한 소시민의 전형에 관한 묘사는 인간-자연, 소시민-억압자(억압하는 부조리함 자체)라는 대유 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해,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어두운 일면을 반영한 것으로 가장된다. 그러나 그것은 유순한 약자-흉포한 강자 사이의 대립, 어느 일방의 강압으로 표현되는, 언더 도그마의 전형적인 단순이원적 구도를 가짐으로 실제의, 여러 층위의 진실이 얽힌 현실과는 이미 멀어져 있다. 약자와 빈자에 대한 우리의 통념에 반하는 모든 가능성, 즉, 그들 역시도 사악하고 교활하며,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소설의 내용과 행간으로 부터 철저히 배제 되어있다.
소년과 가족에게는 보호받아 마땅한, 적어도 침해되지는 않아야 할 유순함과 연약함만이 남는다. 그런 식으로 하나의 확고한, 흔들리지 않는 선善이 확립되고, 그에 맞서는 무엇이든 비난을 퍼부어도 좋을 당위가 완성된다. 그리고 두 모자는, 소년은 불어난 물에 한 가운데, 자연에 의해 포위되고 만다. 연약한 인간은 그렇게 위협해오는 세계와 맞서야할 운명에 처한다. 세계는 그러한 총체의 모순이자 갈등 자체라는 것 - 그것은 현실 인식이 아니라, '나 아닌 모든 세상의 적'에 대한 '계급 투쟁'을 인류의 영원한 숙명으로 받아들여 참가할 것을 강변하는, 이미 낡고 실패한 운동권의 허황된 시선이다.
그러나 세계 멸망을 초래하는 불어나는 물의, 자연의 맹목적인 재해로서의 성질, 상징성은 그처럼 서투르게 제기되는 문제 의식조차도 허무히 무화시키고 만다. 노동 계급, 약자에 대한 소외, 타자화의 문제는 결국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세계 멸망에 관여하는 바가 없다. 온 지상을 물 속에 밀어넣는건 그러한 인간적인 문제가 아닌, 한달이 넘게 쉼없이 비를 뿌리는 알 수 없는 자연의 작용이다. 세계는 별도의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태생적인 결함과 시한에 따라 무너지고 만 것이다. 또는 무너지는건 세계가 아니라, 강대하고 폭압적인 자연에 맞설 힘이 없는 연약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면, 바로 그때에, 그 상황에 감당할 수 없는 물의 재난이 닥치도록, 세계가 애초부터 그렇게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상공에 응집된 물방울들은 어느 시점에는 부유浮遊를 유지할 수 없이 비대해져서 지상에 쏟아지게 되어 있었다. 물로서 비롯된 멸망에는 그러한 필연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인간은 잘못된게 없다. 있다고 해도, 재난을 준비하는 자연의 경향에 의도치 않게 영합하는 부차적인 정도에 그치는 것이다. 또는 자연에 잠재된 위협을 미리 충분히 알아차리지 못해, 그것을 교정하지도, 그에 대비하지도 못했다는 것뿐이다.
그렇듯 태생적으로 문제적인 세계는 파멸의 운명에 처해있다는 것, <물 속 골리앗>은 그러한 전망을, 저주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