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줄평에 대한 몇줄평

by Writingonthewall

나는 영화 한줄평을 그렇게 좋게 보지 않는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그런걸 왜 쓰는지 모르겠다. 이동진, 박평식에 스스로를 이입했으나 결코 그만한 견문이나 어휘력, 문장력을 갖추지는 못한 워너비들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업 비평가들이 남기는 한줄평도 평론으로서의 인사이트를 담고 있지 못하다고 본다. 단지 줄글로 쓰이는 비평의 지위 자체가 한없이 축소되어가는 지금 이때에, 그나마 널리 소비되는 비평의 형식이 그런 것이니까, 평론으로 밥벌이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쓰게 되는 것일뿐. 사실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정성일, 허문영과 같이 한줄평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이는 적지 않다.


영화 이야기가 없는 영화 비평이 무슨 소용일까? 그런 건 지시 대상이 없는 공허한 미사여구의 나열에 불과 할 텐데 말이다. 그런데 실제 (대다수도 아닌 '모든') 한줄평에는 (비평의 대상이 되는) 영화에 대한 특정적인 내용이 없고, 사실 두 시간 남짓하는 장편 영화에 대해서 서술하기에는 한 줄이라는 형식의 분량 자체가 턱없이 모자란 것일 수밖에 없다. 줄글로 쓰는 본격적인 평론에서 조차 매체의 텍스트와 영상 매체 사이의 근본적인 형식 차이가 극복되지 못한채, 영화의 여러 면모가 잘려나가고 텍스트라는 형식에 맞추어 윤색될 수밖에 없는데, 한줄이라는 제한적인 분량 안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내용의 압축은 필연적으로 내용의 손실을 야기한다. 컨텐츠의 분량과 형식은 그것을 온전하게 제공하기 위한 최소 조건으로서, 필요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2시간 30분 러닝 타임의 장편 영화가 그만한 분량을 갖추고 있는 건 그래야만 보여주고자 하는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확보된 러닝 타임을 어떤 식으로든 줄이려고 하면, 영화는 본연의 의도된 바를 모두 보여줄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튜브에서 성행하는 10분 내외의 영화 요약본을 보는 것과 영화 자체를 보는 것이 동등한 체험일 수가 없는 것이다.


한줄평은 그러한 '손실 압축'의 극단적인 예시에 해당한다. 컨텐츠를 담을 절대적인 분량 자체가 확보되어 있지를 않으니, 영화의 디테일이 배제되고 영화 전체에서 대략적으로 얻어지는 모호한 인상만이 비평의 대상으로서 주어진다. 화면에 나타나는 표층의 이미지, 메타포적 대상과 장면 안에서의 배열mise en scene, 시점의 이동, 광학적 대비, 그 모든 것들을 규정짓는 영화의 기술적 사항과 연출의 기조,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모티브의 작용 과정은 불가피하게 누락된다. 그 뿐이면 차라리 다행이겠지만, 그러한 인상의 근거조차도 단지 서술할 여백이 없어서 누락된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남게 되는 건 이 영화가 재미있다, 없다 수준의 단편적인 호오의 표현 아니면 다른 어디에다가도 갖다 붙일 수 있는 모호하고 일반론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미사여구의 배열뿐이다.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모순적이게 아름답다,'는 따위의 말로 형용하는 것이 그 영화에 관해 어떤 것을 말해줄 수 있는가? 이동진이 <인터스텔라>에 남긴 평("SF를 향한 놀런의 웅대한 꿈, 그 한 가운데 자리한 가족 영화의 간절한 순간")은 우리에게 영화에 대한 무엇을 알려주는가? 영화의 어떤 특정한 지점을 지목하고 있는가. 무엇이 모순적이며, 또한 아름다운지, 놀런 영화의 SF적 면모, 그 '간절한 순간'이란 어느 지점에서 어떤 형식으로 위치해 있는 것인지, 영화 자체의 특정적인 디테일을 반영하고 지시하지 못하고 있는 이상, 이러한 비평에는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없다.


물론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러한 표현이 포착하고 있는 영화의 특유한 지점을 필자와 자신의 공통적인 경험에 비추어 알아내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렇게 텍스트 외부적으로 모색되는 가능성이 바로 한줄평이 활발히 소비되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독자가 텍스트의 외부에서 글에 제시되어 있지 않은 별도의 근거와 정합적인 논리를 '독자'적으로 구성하고 정립해야만 한다는 사실 자체가 텍스트의 미완결성과 영화 비평으로서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할) 영화에 대한 특정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방증에 불과한 것이다.


대상의 디테일을 직접 내포하거나 지시하고 있지 못한, 특정성이 없는 표현은 그것이 잠재적으로 모든 것에 있어서 적합하고 동원될 수 있다는 지점에서 이면의 특유한 진실을 포착하는 통찰로서의 생명력을 잃고, '개념 없는 직관'에 불과한 것으로 고착된다. 시적 메타포metaphor, 아포리즘aphorism은 언어가 온전히 모방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구체적인 면모에 대한 언어적 접근, 대상과의 모종의 유사성을 공유하는, 그래서 대상 자체의 간접적 추상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적 대체물을 활용한 대안적인 묘사를 추구함으로서 즉, 기표와 기의 사이의 긴장을 유발함으로서 텍스트의 표층을 넘어선 자신의 인상을 갖는다. 그러나 한줄평은 본연의 기의를 분량상의 문제로 누락함으로서 오로지 부유하는 기표만을 과시한다. 그러한 표현은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어서 아무런 고유한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되고, 대상을 반영하지 못하는 채 단지 모호한 개연성과 고립된 맥락에 따라 인용되는 상투적인cliched 것으로서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의' 감흥만을 남기게 된다.


흔히 한줄평과 함께 매겨지는 별점에도 유사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평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체계 안에서 매겨지는 호오의 정도만을 표시할뿐, 그것이 어떤 기준 하에서, 영화의 어떤 부분에 얼마만큼의 가중치를 부여해가면서 매긴 평가인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독자는 단지 다섯개의 별을 위해 할애된 공간이 얼마만큼 차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인데, 정작 그 특정한 별의 갯수가 갖는 의미와 모종의 척도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 방법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렇게 표시되는 개인적 감상은 불가피하게 보는 이들 나름의 이해와 기준 안에서의 파생적인 감상으로 재구된다. 즉, 박평식과 이동진이 부여한 n개의 별은 별도의 개인적 기준하에서 다른 이가 부여한 별로서 대체되고 소실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 감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개인적인 감상으로 조차 남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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