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다큐멘터리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답은 <파울볼>이라는 제목에 어느정도 제시되어 있다. 야구에서 파울볼은 이도 저도 아닌 것이다. 야구에서 파울볼은 (아무리 멀리, 높게 날아가는 것이더라도 파울 라인을 넘어버린 이상) 안타도 아니고, 야수에게 잡히기 전에는 아웃도 아닌 애매한 타구이다. 그와 같이, 이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는 고양 원더스 선수단은 야구로 밥벌어 먹고 사는 프로가 아닌데, 그렇다고 생업으로서의 야구,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꿈을 아주 놓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굳이 덧붙이자면, ‘파울볼‘이라는 표현은 ‘미생’이라는 관용 표현과 그 용법과 의미가 유사하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결국 그것을 이뤄내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지 않다. <파울볼>은 그보다는 훨씬 비참하고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고양 원더스 단원 대다수는 방출된 전직 선수, 신인 드래프트에 선발되지 못한 실패한 유망주로서, 애초에 프로 선수로서는 태부족의 재능을 가진 자들이다. 즉, 이들이 가진 꿈은 현실적으로 그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다. <파울볼>은 그런 이들이 자신의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분투와 고뇌, 좌절을 그려내고 있다. 평범한 소시민이라면 누구나 이들처럼, 좌절된 꿈에 관한 미련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지점에서, <파울볼>은 나름의 보편적인 호소력을 갖는다. 가망이 희박한 꿈인줄 알면서도 계속 도전하는 삶은 과연 아름다운 것일까. 권면할 만한 삶의 태도일까. 그렇지 않으면 그냥 단념할 때를 모르는 미련일 뿐인 것일까. 이 다큐멘터리가 함의하고 있는 바는 결국 그러한 류의 물음이다.
그러나 안정적으로 정년이 보장되는 평생 직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공무원이 청년들의 제 1 유망 직종으로 꼽히는 현재의 세태 속에서, ‘꿈’이라는 말만큼 공허하고 우습게 들리는 것도 없다. 미래의 생존, 평균적인 남들만큼의 번듯한 삶을 준비하기에 급급한, 그리고 그러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는 개인의 소박한 꿈을 위한 자리가 남아 있지 않다. n포, 사토리, 탕핑 세대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꿈없고 현실에 대해 달관하는 청년들의 등장은 그러한 세태의 필연적인 증상이다.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의 종말, 만성적인 취업난, 주택, 부동산을 위시한 자산 시장의 과열로 점점 더 미래가 막연하고 준비하기 어려운 것이 되면서, 청년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러내고 쟁취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얻어진다는 보장은 없는 미래의 안정을 포기하고, 즉효성의, 지금 바로 얻어지는 현재의 쾌락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미래의 생존과 최소한의 안정에 대해서도 장담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 이상을 바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따라서 오늘날 꿈을 좇는다는 건 자체로 하나의 사치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실패해도 소위 말하는 ’비빌 만한 언덕‘이 있는 사람들만이 온전한 ’자아 실현’으로서의 꿈을 좇을 자유를 갖는다. 적어도 지금을 사는 대다수의 청년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순전히 취업을 위해, 적성에 맞지도 않는 전공을 택해 대학에 입학하고, 대학을 나와서는,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고시 공부를 붙들게 되는 것이다.
사실 작중에 출연하는 고양 원더스 단원들은 비교적 운이 좋은 축에 든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특출난 재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외부에서 단순 ‘적선’ 이상의 지원을 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야구계의 낙오자들을 주워 모아 갱생 시킨다는, 그런 돈 안될 게 뻔한 사업을 달리 누가 추진하려 하겠는가. 네오플의 창립자로서 일찍이 경제적 자유를 확보한 it 재벌이자 소문난 야구광인 허민 구단주가 아니었다면, 한국 독립 야구의 출범은 몇 년 더 늦어졌을 것임이 틀림없다. (고양 원더스의 해체 이후, 연천 이글스, 양주 레볼루션을 위시한 새로운 독립 야구단들과 전국적인 독립 리그가 출범하기는 하였으나, 이들 모두는 독립 야구계의 선발대로서 일련의 가능성을 보여준 고양 원더스에 빚을 지고 있다 볼 수 있다. ‘불모지‘에 처음 씨를 뿌린 선구자와 그의 뒤를 잇는 후계자가 가지는 부담감은 서로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즉, 자신만의 야구단을 가지고 싶어 했던 it 재벌 허민 구단주의 의욕이 이들 ’야구 낙오자’들, 고양 원더스 단원들의 처지와 운좋게 잘 맞아 떨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의 등골을 뽑아 먹는 이외에, 이러한 타인의 전폭적인 지원을 기대할만한 처지가 못된다.
하지만 이들의 ‘행운‘도 어디까지나, 개인 야구단을 소유하고 싶어 했던 허민 구단주의 개인적인 의욕에 달린, 조건적인 것에 불과했을 따름으로, 애초에 불안정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기실 2군 구단들과의 친선 경기에서도 패배를 거듭할 만큼 평균 미만의 전력에 마땅한 수익 모델도 없는 독립 구단이 구단주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당시 '야신'이라 칭송받던 김성근을 감독으로 선임하고, 수십억 규모의 예산을 굴리며 존속할 수 있었던 건, 구단의 자생력과 비전을 어필하여 궁극적으로 일개 독립 구단에 머물지 않고, 프로 야구로의 진출을 기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출된 전직 선수, 드래프트되지 못한 신인 등 야구 낙오자들의 재활을 지원하기 위함이라는, 창단 당시에 내세웠던 '대의 명분'이 무색하게도, 허민 구단주는 이런 돈 안되는 준-자선 사업을 영원히 지속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유력한 가능성 중의 하나였던 ’배드 엔딩‘이 실현된다. 고양 원더스의 프로야구 퓨처스 리그(KBO 2군) 진입이 리그 사무국 측의 거부로 좌절되자, 구단 운영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허민 구단주는 고양 원더스의 해체를 전격적으로 결정한다. 구단이 해체되고, 그들의 꿈을 향한 여정을 지탱해주었던, (구장, 훈련 시설, 코치진들 따위의) 물질적, 교육적 여건들이 와해되어 없어짐에 따라, 이 ’야구 낙오자‘들은 영영 구원의 기회를 잃는다. 김성근 감독이 새 구단을 알아봐 주겠다고 권하는데도, 극구 사양하면서 “저는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한 단원의 모습은 이들이 봉착한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 안타깝게도,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芻狗같이 여기는 이 세상에서 모두가 자신의 꿈을 이루며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신데렐라의 극적인 출세조차 마차와 유리 구두의 도움을 받아, 왕자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그와 같은 일련의 물질적, 인적 여건의 도움없이 우리는 기적조차 기대할 수 없다. 과연 우리 자신은 신데렐라의 마차와 유리 구두, 그녀의 남편이 된 왕자와 같은 든든한 뒷배를 가지고 있는가? 3년 만에 해체한 현실의 고양 원더스와 같은 한시적이고 조건적인 지원이 아닌, 자신을 위한 항구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는가? 그럴 수 있는가? 꿈을 좇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스로에게 자문해 볼 일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소시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양 원더스가 작중 결국 직면한 실패는 그러한 지점에서, 다수 소시민들, 축소 성장 시대의 청년들이 처한 만성적인 좌절과 탈진을 반영하고 대표하는 이미지와 같다고 여겨진다. 말하자면, 우리 별 볼 일 없는 다수는 고양 원더스 단원들의 처지와 그리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