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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장흐름 Sep 30. 2020

나에게 참 많은 것을 주셨던,

류 선생님을 기억하는 졸업생의 독백 편지

첫인상


 내가 류 선생님을 처음 본 것은

2016년 2월, 모란홀이라는 고등학교 대강당이었다.


류 선생님은 중학생 티를 갓 벗어난 3백 명 앞에 서서 학교의 이곳저곳을 프레젠테이션 하듯 설명해주셨다.


"이곳은 본관이고 앞으로 여러분이 생활하게 될 교실입니다."

"여기는 호림관이고 여러분이 공부하게 될 자습실이 이곳에 있습니다."

"급식실은 저쪽에 위치해 있고, 학년을 나누어 식사하게 될 것입니다."


 귀에 또박또박 박히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가히 인상적이었다. 키 180에 덩치 있는 몸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목소리를 갖고 계셨다. 선생님은 강당에서 말씀하실 때 매 문장을 "-입니다. -해주시기 바랍니다."로 마쳤고, 나는 그 단단한 어투 때문에 이 선생님이 상당히 차가운 분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 남아 공부하라."


"학원 다니지 말고 학교에서 공부해라."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결국 성공한다."


 입학 당시 이야기에 의하면 류 선생님은 앞으로 3년간 내가 속한 학년의 부장 선생님이 될 예정이었다. 실제로 졸업할 때까지 부장 선생님으로 따라오신 분이다.


 류 선생님의 어록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단연 "학교에 남아 공부하라."일 것이다. 류 선생님과 1학년 담임 선생님 두 분이 입을 모아 자습을 강조하셨고 나는 하루 이틀 정도 고민하다가 그동안 다니던 수학과 영어 학원을 끊었다. 그때부터 나는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 학생이 되었다.



아직도 선명한 그의 수업


무한급수는 부분분수열과 무한등비급수!
부분합의 극한값, 부분합의 극한값, 부분합의 극한값, 부분합의 극한값!
로그 계산은 짜장면 배달, 로그 계산은 짜장면 배달!


 류 선생님은 수학 선생님이다. 이 분의 목소리는 워낙 커서 문을 닫고 있는 다른 교실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아니, 어째 사람이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지 선생님 목소리는 3년 내내 기차 화통을 삶아낸 듯한 목소리였다.


선생님은 개념 하나를 설명할 때 처음 듣는 학생까지도 놓치지 않겠다는 심정이셨는지 한 문장을 기본 5번은 반복하셨다.


"부분합의 극한값!"

"부분합의 극한값!"

"부분합의 극한값!"

"부분합의 극한값!"

"부분합의 극한값!"


마치 포격하는 듯한 큰 목소리 덕에 꾸벅꾸벅 졸던 학생들도 개념 몇 개는 외워버렸을 것이다. 맨 앞에서 수업을 듣던 나는 아주 가끔 그 목소리가 무서웠다. 알고 보면 절대 무서워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학생들을 온 맘 다해 사랑하셨던



 선생님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기를 바라시는 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원에 가는 학생들을 막으시지 않으셨다.


"쌤~ 저 머리가 아파서 오늘은 야자 못 할 것 같아요."

"아, 쌤! 오늘은 공부할 기분이 아녜요!"


 학생들이 되지도 않는 변명으로 학교를 빠져나가려 했을 때에도 류 선생님은 얄궂은 학생들을 억지로 붙잡으시지는 않았다. 오히려 네가 가고 싶다면 나가도 좋다는 무언의 미소로 학생들을 존중하셨다.


 류 선생님은 사랑으로 몸을 감싸고 계셨다. 주말에도 가끔은 학교에 오셔서 자습하고 있는 학생들을 격려해주셨고, 가끔은 기억에 남는 밥 한 끼를 선물해주는 선생님이셨다.



 수업 중에, 혹은 자습시간에 졸고 있는 학생들을 발견하면 그들의 손을 있는 힘껏 잡아주시는 분이었다. 그 튼튼한 체격에 악력도 무지하게 강했으랴. 학생들은 선생님의 움켜쥠에 잠을 깨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시험기간이 막 지난 한가로운 시간에도 선생님은 학생들을 공부하도록 조용히 시킨 다음, 교탁에 서서 밑줄을 그어가며 성경책을 묵묵히 읽고 계셨다.



나를 응원하고 도와주셨던


 류 선생님은 워낙 살갑고 학생들을 좋아하시는 분이었지만 유독 나와 연이 깊은 선생님이셨다. 글쎄, 왜 그랬을까? 3백이 넘는 학생들 가운데 선생님과 내가 깊어진 이유가 무얼까?


 내가 고등학교 입학 직후 꿈과 비전을 적어오라는 말에 A4 한 바닥을 가득 채워 수학 교사를 적었기 때문일까, 학교에 남아 성실하게 공부했기 때문일까?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해가 바뀌어도 선생님의 사랑은 변함없었고, 나는 그 사랑에 반해 조금씩 선생님을 따르게 된 것 같다. 그런 내 모습을 선생님 또한 알고 계셨고.


 입시와 바로 닿아있는 고등학교 3학년 때도 선생님과 잘 지냈다. 선생님은 나의 학생으로서의 3년간을 부모님 이상으로 잘 알고 계신 분이었고 나의 마지막을 도와주시며 늘 응원해주셨다.



 겨울을 지나 내 대학 결과가 발표된 후에도 선생님과 나는 막역한 사제지간이었다. 실은, 입시를 지난 이때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선생님은 내게 예수님을 소개해주었고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진리의 시선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다.



졸업 뒤에도 끈끈한 교제로


 사실 학창 시절보다 졸업 이후 선생님께 받은 것이 훨씬 많다. 고등학교 시절은 아무래도 중요한 것이 눈 앞에 있는 공부다 보니 선생님으로부터 지식적인 공급을 가장 많이 받았을 것이다. 졸업 후에는 학업의 끈이 아니라 한 명의 어른 대 어른으로서 선생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3년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선생님을 지켜보며 절감한 것은, 선생님의 그 아름다운 인격이 절대 일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선생님의 모습은 나뿐만이 아니라 내 친구도 끄덕이는 훌륭한 교사의 표본이었다. 잠시 잠깐이지만 내 마음속 우상이었던 분이었으니.


 나는 고등학교를 자주 찾는 편이다. 집에서 가깝고, 나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보낸 곳이니까. 늘 학교에 도착하면 류 선생님이 아닌 다른 선생님들을 먼저 뵙고 인사드린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류 선생님을 뵙는다. 만일 순서가 바뀌어 류 선생님을 먼저 뵈면 3시간, 4시간 이야기가 길어져 다른 선생님을 뵐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 뵈어도 변함이 없으시다. 늘 쩌렁쩌렁한 목소리, 허리 하나 굽지 않는 튼튼한 모습.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 입학 때 느낀 첫인상과는 180도 다르다. 그때는 다소 딱딱한 말투라 차갑게 느꼈지만 무슨 소리, 알고 보니 내가 만난 사람들 중 마음씨가 가장 따뜻하신 분이었다.





 만일 내가 학교에 남지 않고 학원을 다녔더라면, 내가 수학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류 선생님과 깊은 관계가 될 수 있었을까? 졸업하고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 깊은 사제 지간으로 인하여 감사하다.


 명절이 되어 인사를 돌리는 가운데 그리운 선생님을 떠올리며 이 글을 열였다. 류 선생님이 다른 학생들에게도 선한 영향을 미치고 그들 가운데 또 아름다운 역사가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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