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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Mar 01. 2020

북간도의 윤동주와 신천지, 전광훈, 명성교회...

시인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1917년에 태어났다.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 출생으로, 명동(明東)소학교를 졸업하고, 은진(恩眞)중학교 등을 거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에 진학한다. 일본에 유학하여 공부하다가 귀향을 앞둔 시점에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년 7월) 복역 중 1945년 2월에 옥사한다. 그의 유해는 고향 북간도의 용정(龍井)에 묻혔다.


윤동주의 짧은 인생은 북간도에서 시작해 북간도에서 끝난다.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포스터에 문익환과 함께 윤동주 사진이 들어간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가 다 아는 민족시인 윤동주가 한반도 밖에서 태어나고 이역 땅에 묻혔다는 사실은 뜻밖이다. 또한 윤동주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도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역사에서 3ㆍ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해외 만세 운동이 펼쳐진 곳을 찾아본다면, 윤동주의 고향 북간도란 지명을 보게 될 것이다. 국내에서 3ㆍ1운동을 준비하는 동안 북간도의 민족지사들도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고, 3ㆍ1운동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13일 용정 서전평야에서 3만여 명의 조선인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 자리에서 북간도 일대의 민족지도자 17명이 ‘독립선언포고문’을 발표했는데, 17명 중 10명 이상이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데 머물지 않고 독립을 ‘포고(布告)‘하여 더욱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여기에는 북간도에서 축적된 조선인들의 국권회복 염원이 반영되었다. 3ㆍ1운동과 3ㆍ13 시위에 앞서 2월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독립선언서’(음력으로 무오년(戊午年)이어서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한다)를 발표하는데, 이 선언은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선언서에는 ‘북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린 김약연 등 북간도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름을 올렸다.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삼촌이다. 김약연은 1899년에 자신의 식솔과 김하규ㆍ문병규ㆍ남도전을 포함한 네 가문의 가족 142명을 이끌고 고향 함경도를 떠나 두만강을 건너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으로 이주했다. 북간도이다.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도 1년 뒤 그곳에 자리를 잡았고, 이들은 ‘동방을 밝힌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명동촌'(明東村)’이라고 지었다. 여기서 ‘동’은 조선을 뜻한다. 다섯 가문은 혼인을 통해 자연스럽게 인척 관계로 발전했다. 김약연의 누이동생은 윤하현의 아들 윤영석과 결혼해 윤동주를 낳았다. 김하규의 딸 김신묵과 문병규의 손자 문재린 사이에서 문익환과 문동환이 태어났다. 


명동촌이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들이 단지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만주로 구명도생한 것이 아니었다.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한 원대한 포부에서 비롯하였다. 후손의 교육을 위해 과감히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주의로 무장하였다. 명동촌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일화 두 가지. 이들은 이주지에서 땅을 경작하여 수확물을 거두면 3분의1은 먹고사는 데 쓰고, 3분의1은 후손 교육에 썼으며(學田), 나머지 3분의1은 군사력을 키우는 데(軍田)에 썼다. 또 하나는 주거하는 집에 얹은 기와 끝의 수막새에는 태극기와 십자가 문양이 같이 들어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조선의 국권 회복. 이것이 북간도의 정신이었다.


3ㆍ13 만세 시위는 우발적으로 터져 나온 게 아니라 이 같은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분출한 것이었고 이후 무장투쟁으로 연결은 필연적이었다. 이듬해 이어진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전장 또한 북간도였으며, 북간도의 기독교인들은 독립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북간도 지역의 조선독립운동을 이처럼 기독교 세력이 주도하였다. 


3ㆍ1운동에는 33인의 민족대표가 있는데, 그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1919년에 조선인 중 기독교인이 약 20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1.5% 내외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6’이란 숫자는 매우 놀랍다. 일제치하에서 3ㆍ1운동을 일으키고 민족대표로 선봉에 선다는 것이, 영광의 길을 걸음이 아니라 수난의 자리로 끌려감이라 할 때 당시 기독교인은 민족의 귀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학자 이만열에 따르면 실제로 당시 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기독교인의 비율은 약 22%였다. 1.5% 대 22%. 조선민족에게 기독교의 존재감은 컸다.

지금도 기독교의 존재감은 크다. 그것도 더 없이 크다. 신천지와 이만희, 전광훈과 태극기, 명성교회 등 재벌급 교회들…. 3ㆍ1절에 윤동주를 떠올리며 하게 된 생각은 생각을 후회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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