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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Apr 12. 2020

세월호 6주년, 다시 슬픔의 우회로 앞에서

실종에 거는 희망


실종. 실종이란 말은 "종적을 잃어 간 곳이나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실종이란 일단 우울한 단어이지만, 판단유보를 담고 있기에 사태의 부정적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문맥에 따라 거대한 희망이 탑재되어 있기도 하다. 아직 실종인 건 어쩌면 희망을 놓지 않을 수 있는 강력한 근거이다. 절망에서 희망을 부르는 데는 그저 희망이란 힘만이 필요하다. 어느 아이가, 춥고 어두운 바다 밑에 있을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더라. 나는 신을 믿지 않기에 기도하지 않고 미천하나마 희망을 품을 뿐이다. 우리는 희망하고 있다. 저 바다에서 벌어진 실종이 절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기를.


2014년 4월 17일 오전 9시




타인의 고통을 읽는 법


어디 있니 애들아. 한겨레 1면 제목이다. ‘저 아래 283명’, ‘283명 제발’처럼 중앙과 동아는 한겨레와 비슷했다. 경향은 실종자 숫자 내세우고 골든타임 놓쳤다 했고, 조선은 경향과 비슷한 틀로 ‘눈 뜨고 아이들 잃는 나라’로 제목 뽑았다. 매경 등의 제목은 속보에 뒤지는 신문 제목으론 그저 그랬다. 아이를 둔 아버지 입장에선 한겨레에 제일 공감했지만…. 언론은 언론이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지 말아야 한다.


2014년 4월 17일 오후 1시




선원법 10조, 개인의 윤리적 좌초과 사회의 좌초


강의할 때 가끔 예로 드는 게 모성애 또는 부성애이다. 누구에게나 목숨이 소중한데 타인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을 바꿀 수 있는 보편적 사례는 보모 자식 사이밖에는 없다는 얘기다. 나만 해도 타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아무런 주저 없이 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경우를 가정하면 아들과 내가 둘 중 하나만 살 수 있는 극단적 상황정도일 것이다. 어머니와 나 가운데 하나만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비슷한 결정을 내리겠지만, 짐작컨대 80이 넘으신 노모는 "나는 살 만큼 살았다. 내 목숨까지 네가 살아라"하시며 내 갈등을 해소해 주시지 않을까. 물어보지는 않았다. 너무 불효자인가? 아무튼 그만큼 제 목숨을 내어놓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재난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걸 우선하는 태도는 일반적이며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진도 앞바다 참사와 관련해서는 선장의 책임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난파시 선장이 승객과 선원을 구한 다음 자신은 맨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려야 한다는 '상식'은 윤리 문제가 아니라 법률 문제인 모양이다. 관련된 법규정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선장은 화물을 싣거나 여객이 타기 시작할 때부터 화물을 모두 부리거나 여객이 다 내릴 때까지 선박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선원법 10조(재선의무)를 이번에 보도를 통해 파악했다. 선장처럼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하여도 세상에는 고도의 윤리의식이 요구되는 직분이 제법 있다. 직분을 맡은 사람이 합당한 윤리의식을 가졌는지가 '윤리적 문제'가 터진 이후에서야 검증된다는 게 문제이다. 더 큰 문제는 그 같은 개인의 윤리적 좌초가 발생했을 때 그 피해가 개인의 좌초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 좌초로 확대된다는 데 있다. 진도 앞바다의 파도는 여전히 높기만 하다.


2014년 4월 18일



"공부하지 말아라"


각급 학교의 수학여행이 잇달아 취소되고 있다고 하네요. 내 아이는 세월호 아이들이 가려던 제주도로 이미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요즘 부모들이 자녀에게 "공부하지 말라"는 얘기를 한다고 합니다. 너무 큰 비극을 목격하면서 사소한 일상에 안달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겠지요. 세월호 비극이 우리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건은 어떤 식으로든 종결될 테고 애도, 책임, 대책 등의 어휘가 또 요란하게 난무하겠지요.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부모들이 다시 자녀에게 "공부 좀 해라"고 윽박지르고 단원고 또래 아이들이 다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겠지요.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침몰해역 또한 여느 바다와 다름없이 그냥 높은 파도 치고 거센 물살이 흐르는 바다로 돌아가겠지요.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 심정에서 생각하면 그 아이들의 부모에게 이 시간이 이 바다가 세월이 흐른다고 잊힐까요.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삶은 늘 계속되기 마련이지만 누군가에겐 산 게 산 게 아니고 삶이 삶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또 하루가 저 조류보다 더 빠르게 지나고 있습니다.


2014년 4월 19일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지 마라


"보지 않았거든 보았다 하지 말고 듣지 않았거든 들었다 하지 말라. 그릇된 선입견이 너의 눈을 멀게 하고 요망한 세치 혀가 너의 입을 갉아먹는다. 나 또한 너 또한 완벽치 않은 인간이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온갖 잡스러운 일이 다 생긴다. 반대로 온갖 잡스런 일이 만연하면 세상이 어지럽다는 징표일지도 모르겠다. 세월호 침몰로 온 국민이 경악하고 있는 가운데 홍 아무개란 인물의 거짓 인터뷰가 공분을 사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인용문은 홍 아무개가 한 말. 모든 세상사를 자신의 이익이나 기회란 관점에서 취급하면 홍 아무개와 같은 일이 생긴다. 문제는 홍 아무개와 달리, 발각되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과 기회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지각없는 사람들의 지각없는 행동은 한번 혀를 차고 넘어 갈 수 있으나, 소위 지도층 인사들의 지각없는 행태는 우리의 우울을 가중시킨다. 어차피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 시점까지도, 이런 생각에.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지 마라.


-2014년 4월 20일




라면상무 vs. 라면장관


라면상무가 한동안 회자되더니 세월호 사태의 와중에 라면장관까지 등장했다. 라면상무는 라면이 본질적 은유이지만, 라면장관의 라면은 은유라기보다는 맥락에 해당한다. 라면상무의 라면이 부정을 담고 있다면 라면장관의 라면은 그 자체로 중립이다. 결국 라면장관의 의미는 라면이 아니라 장관에서 결정되는데, 주지하듯 장관이 라면이 되고 말았다. 맥락의 힘을 활용하는 영리함이 있었다면 징그러웠겠지만 맥락의 힘조차 모르는 무식에는 기절할 노릇이다.


-2014년 4월 21일




세월호, 국회의원, 장관...


거리를 두고 싶지만 거리두기가 안 된다. 국민적 고통 앞에서 조용히 슬퍼하거나 기도하지 않고 이런저런 개인적 논평을 끼적이는 게 꼭 필요한 일이 아닌데, 그래서 오늘은 세상사의 다른 풍경에 주목하려 하지만 도돌이표가 되고 만다. 늘어나는 사망자 숫자와 반비례로 줄어드는 실종자 숫자 같은 것만이 거리두기에 관한 나의 결심을 방해하지 않는다. 큰 고통 앞에 사람은 이성을 잃는다. 그때 비록 다소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비이성에 주목하는 게 아니라 고통의 이면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상식이다. 한데 감당하기 힘든 큰 고통 앞에 이성의 이름으로 상처에 소금 뿌리는 '무례'는 나를 분노케 한다. 소위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이 소위 고위 공직자들이 소금 뿌리기에 앞장서는 현실은 또 다른 희망의 부재를 절감케 한다. 죽음 앞에서 이념은 없다. 거대한 슬픔마저 당리당략으로 재단하는 저들과 승객을 버리고 탈출한 선장 사이에서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까.


-2014년 4월 22일



박근혜, 너무나 인간적인


“당신의 저작을 읽으면 사람은 네 발로 걷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볼테르가 루소에게 한 말이다. 번역문으로만 파악하면 인용문 안의 사람은 네 발로 걷는다 하여도 여전히 인간임이 분명하다. 동물은 그저 네 발로 걷지 네 발로 걷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발로 걷든 네 발로 걷든, 혹은 세 발로 걷더라도 걷는 다리의 개수를 고민하는 동물은 없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선장을 공격한 걸 두고 ‘네가 그럴 자격이 있냐?’고 물었다. 기실 나도 박 대통령의 엄단 운운에 진즉에 마음이 불편하던 차였다. 대통령은 정부와 무관한 존재일까. 국가를 대표하지만 행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대통령이다. 결국 정부의 무능을 질책하는 건 자신에 대한 질책일 수밖에 없는데, 질책의 대상에서 또 책임의 주체에서 자신을 제외할 수 있는 심리구조가 흥미롭다. 박 대통령의 어법을 읽으면 적어도 사람이 네 발로 걷고 싶어지지 않으리란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너무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네 발 달린 인간.


-2014년 4월 23일




이민 가고 싶은 나라, 이민 가도 창피한 나라


세월호 침몰 이후 누군가에게 이민가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번 얘기는, 과거 선거가 끝나면 들리던 이민 타령에 비해 울림이 컸다. 정치적 좌절에 비해 삶의 좌절이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삶의 좌절은 이제 사회 전체의 좌절로 비화하고 있고, 이미 정치로 변질되고 있다. 삶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란 원론과 무관하게, 좌절을 분식하는 정치는 사악한 정치이다. 이 슬픔의 파장이 사악함에 오염되리라는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30년 전에 이민 간 미국의 친구로부터 정말 오랜만에 연락을 받았다. 인터넷을 통해 "내 나라" 이야기를 듣는데 그래서 복잡한 감정이 생겼고, 그중 하나가 창피함이라는. 울긋불긋하던 남산길에 어느새 꽃이 지고 그 색이 연둣빛으로 바뀌고 있다. 봄날이 정말 천천히도 간다.


-2014년 4월 24일



슬픔의 우회로 앞에서


(...) 가운데 오래 지나지 않아서 세월호가 침몰했다. 한두 번은 우러나서 슬픔을 표시하고 무사귀환을 염원할 수 있었다. 카톡에 노란리본을 다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게다. 하지만 희망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고 희망을 좀먹는 추악함이 정말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다채롭게 드러나고, 또 한편으론 특정 의도 아래 공개되는 장면들을 보면서 나는 점점 곤혹스러워졌다. 이 거대한 슬픔을 우회하지 않아야 하고, 또 이 거대한 슬픔을 추호라도 모독하지 않아야 하는데, 내가 목격하는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그 현실의 일부라는 자각이란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으니 모종의 우회로가 있었으면 하는 망상을 품어보지만, 이 또한 염치없는 짓이니, 이 세월이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하다.


-2014년 4월 25일


세월호 침몰 당시의 개인적 기록(2014년 4월 17~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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