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밀양>이 좋은 영화라는 데에는 의견이 대체로 일치하지만, 내용 분석을 두고는 의견이 엇갈리는 듯하다. 우선 이 영화가 그리는 대상이 신인가 인간인가를 물을 수 있다. 조금 단순하게는 기독교에 우호적인가 적대적인가를 따져볼 수 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답하자면 <밀양>은 신과 인간 모두를 묘사한다. 특히 신을 영화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예를 들라면 나는 주저 없이 <밀양>을 말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쩌면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저절로 답이 나오지 싶다. 이 영화는 연출 의도엔 포함되지 않았을 의외의 성취를 보여주는데 나는 그것이 기독교적인 신성이라고 판단한다.
소설가이기도 한 <밀양>의 이창동 감독은 21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초록 물고기>(1997년), <박하사탕>(2000년), <오아시스>(2002년)를 잇달아 발표하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다. 이 중 <오아시스>는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밀양>은 문화관광부 장관에서 물러나고 4년 뒤인 2007년에 내놓은 감독 복귀작이었다. <밀양>으로 주연 전도연은 제60회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의 원작은 이청준의 단편 소설 <벌레이야기>.
용서하려는자, 벌써 용서받은자
<밀양>은 서른세 살의 신애(전도연)가 남편을 잃고 외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이동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이동은 이주이자 도피이며 새 출발이다. 밀양으로 가는 길목에서 차가 고장나며 새 출발이 불길한 것으로 암시된다. 그 길목에서 신애는 종찬(송강호)을 만난다. 세상사의 많은 것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속성을 지닌다고 할 때 밀양으로 가는 길목의 고장과 만남은 영화의 개요를 제시한다.
도입부에 ‘밀양’을 설명하는 대목은 영화의 결론에 해당하는 의미심장한 마지막 장면과 연결된다. 현존하는 밀양시에서 따온 영화 제목 ‘밀양(密陽)’은 영어 제목 <Secret Sunshine>에서 더 분명하게 뜻이 파악되는데, 말 그대로 ‘비밀스러운 햇볕’을 뜻한다. 밀양의 한자에서 어떤 사람은 밀교(密敎)까지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영어 제목으론 당연히 이러한 연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어 제목과 영어 제목 각각의 장단점이다.
영화 <밀양>이 함축한 밀교적인 느낌은,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포함된 세상의 소음을 배경으로 신애가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와, 평범하고 보기에 따라 초라한 마당 한구석을 비추는 햇볕을 카메라가 잡으며 끝나는 엔딩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신애 앞에서 거울을 들어준 종찬의 뚜렷한 존재감이, 화면에서 종찬이 사라진 다음에도 유지되기에 엔딩의 햇볕에서 밀교적인 느낌은 곧 사라진다. 묵직한 울림과 깊은 여운 속에 영화는 이처럼 의미상의 수미상관 구조를 취한다.
마지막의 짧고 강렬한 장면을 위해선 신애의 수난이 필요했다. 신애라는 이름이나 극중 나이가 예수의 지상 생존시기와 일치하는 33살인 것이 우연이 아닐 터이다. 그렇다고 영화 속 신애가 예수를 상징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예수가 신의 아들이자 인간의 아들이었듯, 신과 인간이 예수라는 교차로에서 만난다고 할 때 수난 등 신애에 따라붙은 환경의 설정이 신성과 무관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밀양에 자리를 잡고 피아노 교습소를 꾸려가며 새 삶을 모색하는 신애가 외아들을 잃는다. 아들 준이 유괴되었다가 주검으로 돌아오자 신애는 바닥없는 절망에 던져진다. 유괴범이 준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이었고, 신애가 허풍 삼아 한 돈 자랑을 믿고 원장이 사건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신애의 자책이 더 커진다.
이 절망에서 신앙이 신애를 일으켜 준다. 기독교 신앙을 갖고 교회에 나가면서 신애는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그러나 신애의 고난은 끝나지 않는데, 신애가 진실한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아들 유괴범을 만나 용서의 말을 건네자 유괴범이 자신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외견상 두 사람 신앙의 길은 엇갈린다. 교도소의 유괴범은 계속 독실한 신자로 살아가는 반면 신애는 신앙을 지킬 힘을 잃고 교회를 떠난다. 해학과 풍자에 해당한다고 할, 김추자의 노래 ‘거짓말이야’를 튼 것을 비롯하여 출석교회의 장로를 유혹하는 등 반기독교 행태를 보인다. 신애는 나아가 주변 교회들에 해코지한다. 이후는 신애의 추가적인 수난사로 점철되고 마지막에 종찬이 들어준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끊어내는 가운데 햇볕이 마당 한구석을 비추는 장면으로, 나의 관점으론 진정한 구원을 얻는다. 구원을 얻지 못한 원작 소설과는 다른 결말이다.
머리카락을 자른 행위가 한눈에 불교적 감성에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게, 퇴원한 신애가 우연히 들른 미용실에서 마주친 미용사가 유괴범의 딸이었고, 그에게 미용을 맡긴 신애가 잠시 후 벌떡 일어나 집으로 돌아온 뒤에 스스로 제 머리카락을 마저 자른 것이기에 의미가 복합적이다. 미용실에서 뛰쳐나와 신애와 종찬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배치한 이 감독은 엔딩에선 거울을 보며 스스로 제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으로 결말을 짓는다. 그 거울을 들어준 이는 종찬이고, 그 옆으론 비밀스러운 햇볕이 내리쬔다.
이제 신애를 실족게 한 사건을 살펴보자. 자신이 유괴하고 죽인 아이의 어머니인 신애 앞에서 “나는 용서 받았고, 구원받았다”라고 말함으로써 유괴범은 신애를 혼돈으로 몰아넣는다. 유괴범의 회심과 귀의는 물론 가능한 일이다. 당연히 어떤 죄인이라도 신 안에서 용서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죄에 대해 신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았기에 인간에게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안하무인은 천박한 속류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독신(瀆神)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신교에서 좋아하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가장 악질적인 예를 유괴범의 신앙이 구현한 셈이다. 값싼 은혜로 천국행 티켓을 끊을 수 있다는 생각이 영화속 유괴범에만 해당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인간에게 지은 죄가 있으면 인간에게 진정으로 사죄하는 죄인을 신은 용납한다. 그러한 태도를 전제하며 또는 그러한 태도와 함께 믿음이 더해질 때 신은 그 사람을 용서하고 구원한다.
영화 속 신애의 ‘일탈적’ 태도에 문제가 있지만,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믿는 유괴범의 용서받지 못할 일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가여운 인간이 할 수 있는 안타까운 모색의 범주에 속한다. ‘거짓말이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억지로 기도하는 대다수 신도보다 그 노래를 튼 신애를 신이 더 사랑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신은 누구인가
만일 신이 있다면 종찬의 모습을 하였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특히 기독교의 신은 종찬의 모습과 똑같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긴 올바른 종교의 신이라면 종찬의 모습과 다를 이유가 없다. 조금 모자라고 평범할 정도로 세속적이지만,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신애의 옆을 말없이 맴돌며 신실하게 지켜준 이가 종찬이다. 고장 난 신애의 차를 끌고 밀양에 들어가는 시작부터 거울을 보려고 머리를 숙인 신애 앞에 나타나 다정하게 거울을 들어주는 마지막까지 종찬은 신애의 옆을 떠나지 않는다.
신애가 허리를 펴고 제 머리카락을 자르는 동안 조용히 바라보며 눈높이에다 거울을 대준 사람. 신이 있다면 그 사람이 신이다. 그 사람이 ‘비밀스러운 햇볕’이기도 하다. 송강호는 잘 몰랐겠지만, 그의 역대급 연기를 보여준 <밀양>에서 송강호는 실제로 하나님을 연기했다.
‘이신칭의’를 천박하게 해석하는 상당수 개신교 교회에선 종찬과 같은 하나님 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간구를 들어서 복을 주시고 대적을 물리쳐 주시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상정된다.
반면 기독교와 유대교의 오랜 전통의 일각에서 상상한 하나님은 자신을 움츠려서 공간을 열어줌으로써 세계와 인간이 스스로 펼쳐나갈 수 있게 허용하고 무엇보다 그 세계와 인간을 따뜻하게, <밀양> 엔딩의 햇볕처럼 송강호처럼 지켜보는 존재였다. 고통받고 힘든 영혼을 위로하며 옆에서 같이 고통받는 존재야말로 신이라는 생각이다. <밀양>에서 종찬이 연기한 그 모습이다.
논의를 더 깊이 진행하지 않지만, 이 감독이 <밀양>에서, 전체적으로도 그렇지만 특히 종찬을 통해서 보여준 것은 신성(神性)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감독이 이 영화에서 연출자 역할을 하며 동시에 사제직을 수행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아주 특별한 사랑
영화 <밀양>이 신성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형상화하였지만, 종찬을 그냥 인간의 상(像)으로만 해석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종찬은 영화 내내 신애를 향한 사랑을 지속해서 드러내지만 직접적이지 않고 압박하지 않는다. 희생과 헌신, 인내로 묵묵히 사랑하는 사람을 지킨다.
종찬의 사랑은 거의 조건 없는 사랑이다. 신애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다. 때로 자신의 순수한 감정을 이용하는 듯해도 흔들리지 않고 바보처럼 호응한다. 특히 신애가 아들을 잃고 절망에 빠졌을 때, 말없이 곁에 있으며 위로한다. 신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듯이 사랑한다.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행복하다고 한 유치환 시구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이다. 그러나 일방적인 사랑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영화 후반부에서 신애가 자신의 신앙적, 감정적 위기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을 때 여전히 자신의 곁을 지키는 종찬을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바라본다. 신애가 슬픔과 고통을 넘어서며 한 걸음씩 인간적으로 성장할 때마다 한 걸음씩 종찬과 가까워지는 모습을 영화는 그린다. 인내와 헌신이 가득하고, 상대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한 깊은 공감으로 자신을 감싸는 종찬. 그에게 신애가 끝내 마음을 열 것이라고, 엔딩의 장면을 통해 관객은 짐작한다. 서로를 받아들이는 열린 결말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종찬의 캐릭터를 현실에서 찾기는 어렵다. 그는 상대의 고통에 같이 아파하면서도 상대가 고통스러워할 시간과 공간을 존중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하고,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절제한다.
이러한 공감과 배려는 신애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거리를 두려고 할 때도,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고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것으로 이어진다. 위로와 치유를 제공하고 강요하지 않으며 언제나 곁을 지키는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사랑으로 분류될 수 있다. 현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실현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보통 그리스에서 사랑을 분류할 때 에로스ㆍ필리아ㆍ아가페ㆍ스토르게의 4가지를 많이 든다. 에로스(Eros)는 육체적 열정과 욕망에 기반한 사랑이다. 플라톤은 이중적인 의미로 에로스를 사용했다. 필리아(Philia)는 친구나 동료 사이에서 나타나는 우정이나 상호 존중에 기반한 사랑이고, 스토르게(Storge)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가족 간의 자연적 애정 같은 본능적이고 안정된 사랑을 말한다. 아가페(Agape)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기독교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사랑의 형태로 이 용어를 쓴다.
종찬의 사랑은 이중 어느 것에 해당할까. 거의 모두 목격된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종찬의 사랑과 관련하여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그리스어는 앞서 언급한 4개가 아니라, 필라우티아(Philautia, φιλαυτία)이다. 필라우티아가 단어 조성상 ‘자기애’를 뜻한다고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종찬은 신애를 일으켜 세우며 신애의 자기애 혹은 자기존중감을 회복시킨다. 마지막 장면에서 거울을 들어주어 신애가 허리를 굽히지 않고 제 얼굴을 똑바로 보며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게 해주는 종찬은 신애의 필라우티아를 복원한다. 신이 원래 인간에게 하는 일이 그런 일이니, 결국 종찬을 신성과 결부시키는 일을 모면하지 못하는 셈인가. 하늘의 달과 별이라도 따줄 듯한 그의 사랑이 영화 밖에서 그래서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