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헤르츠 고래들(52ヘルツのクジラたち)
북태평양 일대에 ‘52-hertz’로 불리는 생명체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냉전 말기인 1989년에 미국이 옛 소련의 잠수함을 탐지할 목적으로 만든 음향감시체계(SOSUS)에 처음 포착되며 정체를 전했다. ‘52-헤르츠’라는 이름은 1992년에 미 해군이 부여했다. 이후 2004년까지 매년 감지되었고, 한동안 이 소리가 잡히지 않다가 2010년 이후에 다시 산발적으로 포착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
영화 <52헤르츠 고래들(52ヘルツのクジラたち, 52-Hertz Whales)>은 마치다 소노코의 동명소설을 극화한 작품으로, 미국이 발견한 이 생명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사실 이 생명체가 고래인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잠수함이 아니라는 사실만 알 뿐이다.
일반적으로 고래는 12~25헤르츠 사이의 주파수로 의사소통을 한다. 대왕고래는 약간 높은 30헤르츠를 이용한다. 추정대로 만일 이 생명체가 고래이고, 선천적인 장애 등의 이유로 고래가 쓰지 않는 주파수로 소리를 내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있다면 지칭되듯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가 맞다.
영화는 제목으로 이미 어떤 이야기를 할지를 선언한 상태다. 제목의 고래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니, 다행히 영화 속의 ‘고래’는 소통할 대상이 있는 셈이다.
주인공인 키코(스기사키 하나)가 영화의 중심에 있는 ‘52헤르츠 고래’이다. 어릴 적부터 엄마에게 학대받고 자랐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반신불수로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 의붓아버지를 3년째 병구완하며 지낸다. 자발적이지 않은 간병과 여전한 엄마의 학대 속에 무력한 나날을 보내다 ‘안고’(시손 쥰)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독립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52헤르츠 고래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 울음을 들려주며 녹음본을 키코에게 선물한 이가 안고이다. 안고가 두 번째 ‘52헤르츠 고래’다. 안고는 심해에서 고통과 외로움에 비명을 내지르는 키코의 52헤르츠 울음을 듣고 손을 내밀었다. 그 비명을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지만 안고는 들을 수 있다. 같은 주파수대에서 울음을 우는 같은 종족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짝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관계는 그러나 진척되지 못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분명한 두 사람의 사랑이 지지부진한 사이에 키코는 그야말로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일하는 회사의 사장 아들과 인연이 맺어진다. 키코에게 신데렐라의 인생이 열린 것일까. 그럴 리가. 상식적으로 그런 전개는 영화를 성립하지 않는다.
안고는 키코를 사랑하는 데도 왜 키코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의 곁을 맴돌기만 하는 것이까. 두 사람 사이에 스파크가 튄 첫 스킨십 장면에서 키코가 특별히 언급한 ‘안고의 부드러운 손’에 답이 있다. 키코의 잘못은, 제 삶이 힘들어 제 고통의 울음을 우는 데 급급했고, 울음소리를 듣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안아주는 위로에 행복해할 뿐 상대의 52헤르츠 울음은 들으려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크게 비난받을 잘못은 아니다. 제 슬픔이 커서 남의 어깨에 기대 흐느끼는 순간에 남의 고통까지 헤아릴 수 있다면 그 슬픔은 진짜 슬픔이 아닐 것이기에. 그래도 어느 순간엔가는, 내보이지 않는 그의 슬픔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면 더 좋았겠다. 영화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가정하고 하는 얘기다.
뒤늦게 키코는 다른 상대에게서 그 울음소리를 듣고 안도가 키코에게 한 일을 그에게 한다. 그 상대는, 키코가 도쿄에서 받은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상처를 추스르려고 내려간 오이타의 할머니 옛집에서 만난 소년이다.
평행이론?
영화에 나오는 ‘52헤르츠 고래’는 대략 지금까지 언급한 세 명이다. 이 셋이 일종의 평행이론을 형성한다. 울음을 알아듣는 방향을 기준으로 ‘안도→키코’의 관계가 ‘키코→소년’으로 반복된다. 52헤르츠 울음을 울 뿐 아니라 들을 줄 알게 된 키코가 성숙해져서 위로하고 안아주는 역할을 맡는다. 이때 공간축이 바뀐다. ‘안도→키코’의 관계가 도쿄라는 삭막한 도시를 배경으로 했다면, ‘키코→소년’ 관계는 서정적인 오이타의 바닷가를 무대로 했다. 바다는, 상징으로서 고래가 아니라 실제로 고래가 헤엄치며 살아가는 곳이다.
시간축은 오이타가 현재이고 도쿄는 과거이다. 키코가 풀어가는 오이타의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도쿄의 옛이야기가 치고 들어오는 식이다. 두 이야기가 일종의 닮은꼴로 보이지만, 결정적 차이가 제시된다. 소통이다.
52헤르츠 고래가, 소통불능 상황에서 대답없는 대화에 착수해, 지칠 때까지 희망없는 발화를 이어가는 고립과 고독, 그리고 소통 욕구를 상징한다는 사실은 한눈에 들어온다. 영화에서 소년이 실명 대신 ‘52’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말을 못 한다는 것 또한 너무 뚜렷하게 드러나 있어 은유 같지도 않고 직유로 보인다. 소통과 관계의 좌초로 끝난 도쿄와 달리 오이타에선 소통과 관계의 성사로 탈바꿈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결말이 상투적이긴 하지만, 이런 유의 영화에선 피하지 못할 상투성이다.
제작진이 염두에 둔 것은 유사가족의 가능성이었다. 혈연으로 묶이지 않은 가족, 제도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가족을 보여준다. 혼외정사, 트랜스젠더의 이성애, 처녀의 입양 중에서 성사된 것은 마지막 관계였다. 세 번의 자살 시도 중에서 실제로 죽은 사람도 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설정 속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주려는 것은 위안이다. 너 괜찮다. 너 사랑받아도 되는 사람이다. 남과 달라도 그대로 너는 너로 존중받아야 한다.
이런 분명한 전언과 오이타의 아름다운 풍광은, 다소 신파적인 느낌과 작위적 과잉이란 불편을 감수하게 해주지 않을까 싶다. 영화가 현실에 없는 위안을 준다고 비난할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키코의 집
나루시마 이즈루 감독이 영화 속에서 중요한 장소로 꼽은 곳은 오이타 키코의 집이었다. 마음의 상처를 숨긴 채 작은 바닷가 마을의 외딴집에 사는 그의 모습을 담아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과거 할머니가 살던 곳으로 설정된 이곳의 매력은 테라스다. 하늘과 바다에서 바라보는 원근감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반대로 키코의 등 뒤에 카메라를 놓으면 52헤르츠 고래가 사는 곳인 바다를 잡아낼 수 있다.
52헤르츠 고래는 2022년 ENA 수목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도 언급됐다. 우영우란 캐릭터 자체가 52헤르츠 고래인 셈이다. 극중 우영우의 휴대폰 번호 뒷자리를 ‘5252’로 한 것 또한 52헤르츠 고래와 연관된다. BTS가 ‘Whalien 52’란 곡으로, EXO도 ‘Sing For You’에서 52헤르츠 고래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키코에게 평온한 삶의 회복과 나름의 해피엔딩이 주어지지만, 안도에게는 정체성의 좌초, 사랑의 실패, 그리고 삶의 절망과 너무 이른 종언이 남는다. 키코의 회복은 역설적으로 그가 더는 52헤르츠로 소통하지 않기에 가능했다. 52헤르츠로 내는 고통의 발화를 들어주는 52헤르츠의 청자가 있어 그와 소통의 걸음마를 시작하고 소통에 익숙해지자 ‘52헤르츠 언어’를 포기함으로써 고립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면 너무 매정한가.
‘52헤르츠 사랑’이 그 자체론 실패하는 사랑이란 현타 같은 걸 영화가 숨기고 있는 건 씁쓸하다. 어쩌겠는가, 전쟁이든 삶이든 혹은 사랑이든, 승리자가 또는 최소한 생존자가 전리품이든 무엇이든 누리는 게 인생의 이치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