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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Oct 27. 2024

사랑에서 호명의 무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

      

엔딩이 유명한 영화를 들라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을 빼놓기는 힘들다. 첫사랑의 상처로 고통받는 혹은 그 상처를 치유하는 벽난로 앞 17살 소년 엘리오(티모시 살라메)의 엔딩의 긴 울음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이다. 엔딩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엘리오의 어머니가 그를 “엘리오”라고 부르고 엘리오가 반쯤 뒤돌아보며 영화가 끝난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수프얀 스티븐스의 ‘Visions of Gideon’이 배경으로 흐른다. “(우리 사랑이) 영화에서 본 것이었을까요?(Is it a video?)”     


I have loved you for the last time

Is it a video? Is it a video?

I have touched you for the last time

Is it a video? Is it a video?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Call Me By Your Name’은 영화 제목이자 대사이다. 나를 부를 때 내 이름 말고 네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요청은 이름 부르기의 끝판왕이다. 이름 부르기는 사랑의 본질이다. 예컨대 매매춘이라면 서로 상대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이름이 주어진다고 해도 실명이 아닐 테고. 실명이라고 한들 딱히 의미를 찾기가 힘들다. 욕망의 충족이 목표일 뿐 존재의 충족을 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를 네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사랑에서 이뤄지는 일반적인 이름 부르기와 의미의 결이 살짝 다르다. 극중 대사는 하나의 이름만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나도 너를 내 이름으로 부를 게(Call Me By Your Name, and I'll Call You By Mine)”는 특별한 방식의 상호 호명이다. 


이 특별한 호명 방식에, 엘리오와 올리버(아미 해머)가 서로의 이름을 교환하여 존재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었다는 흔히 행해지는 해석이 적용되어선 안 된다. 일단 경계가 무너지진 않는다. 너를 나로 호명하는 건 내가 나를 사랑하듯이 너를 사랑하겠다는 의미이다. 자기애만큼 강한 사랑이 없기에 관점에 따라 최고의 사랑 고백이지만, 동시에 자기 사랑을 잃어버리면 상대에 대한 사랑 또한 무너질 수 있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에 그치지 않고, “나도 너를 내 이름으로 부를 게”에 이른 데에 유의해야 한다. 겉보기와 달리 자기중심적 관계 형성이다.


자기혐오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떠올리면 이런 사랑의 위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엘리오를 향한 올리버 사랑의 좌초는 “나도 너를 내 이름으로 부를 게(I'll Call You By Mine)”에서 기인한다. 사랑하는 대상의 변경인지, 동성애에서 이성애로 손쉬운 타협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올리버인 엘리오를 올리버가 사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화가 그렸듯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나도 너를 내 이름으로 부를 게”가 매혹적인 사랑의 형식이긴 하다. 원론적으로 원래 더 나은 사랑이란 건 없다. 아마 더 진실한 사랑은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며, 내가 투영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바꾸려 들지 않고 사랑하는 방식에서 찾아질 가능성이 크다. 다른 종류의 사랑이긴 하나, 영화 마지막에 어머니가 엘리오를 그의 이름으로 부르는 장면은 더 진실한 사랑의 예에 해당한다.


어머니가 엘리오의 이름을 부르며 영화를 끝낸 것에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좋은 감각을 엿볼 수 있다. 감정의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안정과 위로를 전하는 행위로, 엘리오의 정체성을 따뜻하게 상기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여전히 사랑받고 있으며, 그 자체로 충족적인 존재임을 호명을 통해 알려준다. 엘리오가 엘리오라고 부른 올리버가 엘리오에게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해주었다면, 어머니의 호명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자신의 삶과 정체성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운다. 엘리오가 자신의 이름으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상징적인 순간이다.      

퀴어동화를 통한 보편적 사랑의 탐색     


2017년 개봉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안드레 아치먼의 동명 소설을 구아다니노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으로, 사랑과 욕망, 인간 존재에 관한 탐구를 담았다. 1980년대 초반 태양이 내리쬐는 이탈리아 북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17세 소년 엘리오와 그곳을 연구 작업차 방문한 24살 대학원생 올리버 사이 여름날의 로맨스를 다뤘다. 서사의 감정적 깊이와 사랑의 미묘한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해 호평을 받았다. 


동성간의 사랑을 그리면서 금단의 영역을 설정하거나 비극으로 묘사하지 않고 감정의 진실성과 순수함에 초점을 맞추었다. 퀴어 로맨스에서 흔히 등장하는 외부적 갈등과 사회적 압력 대신 두 사람 내면의 갈등과 감정의 흐름에만 집중한 게 이 영화의 특징이다. 보편적 사랑의 경험을 탐색했다.


퀴어 로맨스의 복잡성과 아름다움은 동화처럼 그려진다. 퀴어동화적 성격은 이 영화의 독특한 매력이자 현실성과 관련하여 비판받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화 끝부분에서 올리버에 의해 잠깐 언급되듯 엘리오의 부모를 현실에서 찾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 배경인 1980년대 초반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사랑진리의 사건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을 통해 인간적인 감정과 보편적 욕망을 보여준다. 퀴어 로맨스라는 걸 하나도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연출했다. 사랑의 형식이 고정돼 있지 않으며, 사랑의 본질은 서로의 존재를 깊이 이해하고 그 속에서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얘기를 자연스럽게 전한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건과 진리를 중심으로 세계를 설명하는데, 이 영화의 사랑을 설명하는 데에도 유효해 보인다. 기존 질서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정하여 금지한 새로운 가능성. 철학이 그것을 사유해야 한다고 바디유는 믿는다. 불가능한 것은 배제되고 금지되지만, 가끔 아주 돌발적인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이다. 사건은 불가능하다고 선언된 것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사랑 또한 사건일 수 있다. 특히 이 영화에서 다룬 사랑은 사건이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온갖 고독을 넘어 세계로부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포획되는 것”이다. 사랑은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이자, 서로 다른 두 관점에서 세계를 탐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바디우가 종종 성차에 주목하며 남녀 간의 사랑을 논의하지만, 그의 개념은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사랑의 보편적인 본질을 구명하는 데에 적용될 수 있다. 엘리오와 올리버 간의 사랑 역시, 두 사람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한 진리의 생산으로 볼 수 있다. 


바디우의 철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적 사건은 삶의 진리를 주체적으로 직면하게 하여 주인공을 성장으로 이끈다. 영화는 성장소설의 형태를 따르면서도 로맨스의 달콤함과 쌉싸름한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삶의 포괄적 진리를 아름답게 포착하는 방식으로 이 사건을 영화화했다.


아름다움은 상처를 포함한다. 사랑이 진리의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움 이후’가 중요하다. 엘리오의 아버지가 엘리오에게 전하는 다음의 조언은 사랑의 상처가 인간의 정체성과 성숙에 얼마나 깊이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성찰을 담았다.     


“우리는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것보다 빨리 무언가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너무 많이 뜯어내고, 그러다 보면 서른이 되어 파산하고, 결국 새로운 사람과 시작할 때마다 줄 것이 점점 적어진다.”     

We rip out so much of ourselves to be cured of things faster than we should that we go bankrupt by the age of thirty, and have less to offer each time we start with someone new.   

  

인간이 상처나 아픔을 빨리 극복하려고 서두르다가 오히려 감정적으로 소모되어 서른 살 즈음에 정서적 파산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경고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마다 상대에게 줄 것이 점점 없어지게 된다. 첫사랑에 상처받은 17살 아들에게 전하는 아버지의 애정 어린 충고는 사랑 전반에 유효하지 싶다. 다만 서른 살이 넘은 사람에게 이 충고가 여전히 유효한지는 사람마다 달라질 것 같다.     


첫사랑     


이 영화는 첫사랑의 설렘, 불안, 그리고 순수함을 눈부시게 묘사한다. 영화 초반부, 엘리오와 올리버가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아스라한 첫사랑의 감정을 담아냈다. 이탈리아의 여름 햇살 아래에서 두 사람이 어색하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을 수채화처럼 그린다. 


수영장에서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시간 또한 첫사랑의 설렘을 잘 표현한 장면. 침묵 속의 교감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첫사랑의 혼란한 감정을 관객에게 잘 전달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나 산악 등반 등 사랑의 현상을 대중적으로 잘 형상화했기에 이 영화는 동성애와 이성애를 막론하고 첫사랑의 순수한 감정을 그린 고운 작품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엘리오가 ‘복숭아’를 사용해 올리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장면을 꼽지 싶다. 엘리오의 성적 각성과 올리버에 대한 감정이 절정에 달했음을 상징하는 장치이다. 첫사랑의 혼란스러움을 보여주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필립 로스나 헨리 밀러의 소설에서 보던 텍스트가 이 영화에서 성공적으로 영상으로 실현된 셈이다. 


영화에서 엘리오와 올리버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정체성과 관계의 복잡성을 심화하며, 이방인으로서 감각과 소수자로서의 경험을 혼융해 이야기에 더 깊은 결을 부여한다. 엔딩을 유대인 축제인 하누카와 겹치게 함으로써 엘리오의 성장과 변화를 상징적으로 마무리한다. 관객 모르게 꽤 많은 이야기를 후경과 무대에 배치해 영화의 무게를 구현했다.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는 방식으로 무게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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