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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Oct 27. 2024

‘보내고 버려진’ 40살 여자의 사랑찾기

<사랑의 탐구(The Nature of Love)>

     

40살 여자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만일 그 여자가 결혼했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유부녀의 불륜이란 표현을 떠올리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캐나다 영화 <사랑의 탐구(The Nature of Love)>(2023년)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40살 유부녀 소피아(마갈리 레핀 블롱도)의 불륜을 통해 그린다고 말할 수 있어, ‘연필 부인 흑심 품었네’까지는 아니어도 어쩌면 제대로 된 영화가 아닌 그렇고 그런 영화일지 모른다는 편견을 갖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제76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됐고 제48회 세자르상에서 외국영화상을 받았으니 그렇고 그런 영화가 아닐 가능성을 높인다. 여기서 유부녀와 불륜이란 규정 자체에 논란이 있을 수 있어 40살 여자의 사랑찾기로 정정하는 게 좋겠다. 로맨틱코미디로 분류되지만 꽤 진지한 영화이니 그렇고 그런 영화 취향이라면 안 보는 게 좋다.     


사랑은 동사다     


40살 여자의 사랑 탐구에서 구도는 그렇고 그런 흔한 구도다. 한 여자와 대조적인 두 남자. 두 남자 사이에서 진정한 사랑을 탐색하다가 다시 홀로 서는 결말. 이런 유의 영화가 뻔한 줄거리 속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모니아 쇼크리 감독이 했을 법한 고민이다. 


소피아는 철학 강사로서 삶을 지성적으로 풀어내는 데 익숙하다. 10년 이상을 함께한 파트너 자비에(프란시스 윌리엄-레옴)와, 자신의 스타일에 부합하는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관계를 이어간다. 별장 수리를 위해 인테리어 시공업자 실뱅(피에르 이브 카르디날)을 만나며 새로운 욕망에 눈뜨는, 극중 대사처럼 채털리 부인으로 도약한다. 자비에는 소피아와 마찬가지로 지식인이자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다. 실뱅은 맞춤법이나 어법을 종종 틀리고 몸 쓰기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노동자이자 블루칼라 가정 출신이다.


소피아와 실뱅의 로맨스가 영화의 중심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사랑보다는 사랑을 찾는 40살 여자의 이야기이다. 주연이 세 사람이지만, 주인공은 한 사람이다. 비록 프랑스어 제목 ‘실뱅처럼 단순한(Simple comme Sylvain)’이 실뱅을 주인공처럼 보이게 하지만, ‘단순하다(Simple)’고 인식하는 주체가 소피아이다. 실뱅처럼 단순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사랑을 탐색한 소피아의 인생 이야기이다.


확인하고 넘어갈 것은 소피아와 자비에 사이가 법적 부부는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 부부로 인정되는 관계라는 사실이다. 남편이 아니라 파트너라고 부르지만 어느 정도는 충실의무를 의식하고 경제 및 생활공동체를 꾸려간다. 자베에와 헤어지기 전에 실뱅과 관계를 맺으며, 불륜이라고 인식하지 않지만 바람핀다는 정도의 생각은 한다. 따라서 유부녀와 불륜이란 규정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러한 전제나 제약과 무관하게 사랑은, 그것이 사랑인 한 언제나 사랑이다. 이 영화는 아직 우리나라에선 보편적이지 않은 가족제도의 변화를 반영한 남녀관계를 그렸다. 


쇼크리 감독은 여러 철학자의 견해를 철학강사 소피아의 입을 통해 전하며 사랑의 본질을 탐구한다. 육체적 욕망과 정신적 합일이 사랑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은, 플라톤, 스피노자, 벨 훅스 등의 사상을 통해 논한다. 그중 사랑이 동사라는 시각이 소피아의 생각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사랑은 다양한 양상으로 분출하며 단순히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것 중 하나로 정의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정신과 육체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인간의 본질적 감정임을, 불혹 나이의 여자 소피아가 새삼 깨닫고 새롭게 자신으로 서려는 모습을 영화는 추적한다.      

불혹의 소피아      


소피아가 결혼과 다름없는 안정적 관계를 포기하고, 첫눈에 반한 남자 실뱅과 불같은 사랑에 빠지는 모습은, 현실적이지 않지만 누구나 부러워할 만하다. 소피아의 욕망과 본능이 걸맞은 상대를 만나 해방되는 순간이다. 지적이고 한결같은 자비에는 자신의 정신과 잘 소통하지만 소피아의 감정과 욕망을 자극하지 못했다. 노동자 계급의 실뱅은 지적 대화 대신,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소피아는 실뱅과 만남을 통해 자신에게 숨겨진 삶의 다른 면모를 발견한다.


40살 여성으로서, 소피아는 살아오며 많은 것을 경험했다. 안정적인 관계의 편안함과 무엇보다 예측가능성을 선호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욕망을 채우지 못한다. 깊숙한 곳에 있는 욕망이 일깨워지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일깨워진 다음엔 갈증에 대처해야 한다. 실뱅과 관계는 갈증을 채우는 육체적 탐닉을 넘어, 그가 그동안 알지 못한 자유와 새로운 자아를 찾게 해준다. 


그러나 열정적이고 격렬한 실뱅과 관계가 다른 단계로 넘어가지는 못한다. 40살 여자는, 41살 생일을 맞으며 받은 실뱅의 청혼을 일단 승낙하지만, 고민 끝에 거부한다. 불혹의 여자는 두 남자를 모두 떠나보낸다. 둘 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다는 뜻일까.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다는 얘기보다 애초에 진정한 사랑 같은 것은 없다고 이야기해야 하지 싶다. 진정한 사랑이란, 협의란 단서를 달아, 플라톤적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이 ‘플라토닉 러브’여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사랑의 본질(The Nature of Love)이란 게 원래 없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본성(The Nature of Loving)’이 인간에게 주어져서 사랑을 진정으로 사랑하느냐만이 관건이 된다.


관객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텐데, 나로서는 이 영화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기’로 느껴진다. 후자의 ‘사랑하기’는 동사를 기본으로 하기에 그 목적어에 최종적으로 자신이 포함된다.


소피아는, 자비에를 대체한 실뱅과 관계가 완벽한 대체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자비에와는 거부한 2세를 실뱅과는 가능하다고 믿게 한, 몸속의 DNA까지 뒤흔든 사랑임에도 불혹의 여자는 41살 생일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실뱅과 맺는 관계에 대한 확신 부재와 결혼이라는 제도적 구속에 대한 두려움 등 많은 생각이 41살의 변화를 주저하게 만든다. 소피아에게 사랑은 단순히 열정이나 욕망의 문제가 아니며, 자신의 삶 전체를 고려한 선택과 행동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만일 주인공이 30살 여자였다면 양상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이립(而立)은 자신이 휘청거리면서도 휘청거리는 줄 모르고 바로 섰다고 착각하는 나이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불혹(不惑)의 소피아는 유혹당하면서도 유혹당하지 않는 지혜를 지닌 것으로 그려진 셈이다. 현실의 불혹이 실제로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 경험과 관찰에 근거하면 불가능한 캐릭터다. 유혹당하면서도 유혹당하지 않는 태도가 불가능하다는 게 아니라, 지혜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국내보다 한 해 앞서 2023년 해외에서 이 영화가 개봉될 때 1983년생인 초크리 감독의 나이가 40살이었다. 초크리는 극중에 소피아의 친구 역으로 출연한다.     


버림으로써 버려지는      


영화 <사랑의 탐구>의 전언은 복합적이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중심 주제가 사랑의 본질이어서, 영화는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나 일시적인 열정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선택과 책임, 그리고 자기 탐구의 결과로서 동사로 행동해야 한다는 관점을 뚜렷이 한다. 사랑은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면서 스스로를 찾는 여정이기도 하다.


두 번의 헤어짐이 그려지는데, 겹쳐지게 연출했다. ‘보내고 버려지는’ 형식의 영상 처리는 소피아의 내면 상태를 보여준다. 여자가 먼저 결심해 통보하고 남자가 떠나며 여자는 버려진 모습으로 남는다. 떠나보냈다고 버려지지 않은 건 아니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 ‘보내고 버려지는’ 모습이 더 애잔하고 성숙한 느낌이다. 남자들이 자동차와 함께 떠나고 소피아는 홀로 남는다. 엔딩으로 처리한 두 번째 남겨짐에서 감독이 <사랑의 탐구>를 통해 전한 사랑의 본질을 관객은 압축적으로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사랑에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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