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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은정 Apr 02. 2018

영화가 나에게 하는 질문들
<8월의 크리스마스>2

2) 사진, 그 ‘현재’들에 대하여 

영화의 배경이 왜 사진관일까? 왜 ‘사진’일까? 이 얘기를 하기 전에 나의 어릴 적 사진을 들여다 본적이 있을 것이다. 나의 6살, 7살 혹은 나의 11살, 12살 등. 사진 속에 어린 내가 있는데 그 ‘어린 나’는 어디에 있는가?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나라고 할 수가 없다. 얼굴이 다르고 키가 다르고 아는 것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이렇게 다른 것이 많은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말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이제 그때의 내가 아니야.” 

“나 많이 변했어.” 

“예전의 내 모습을 다 잃어버렸지.” 

사진 속의 나와 지금의 나는 시간의 연속성을 가지고 동일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도 똑같은 것 같지만 분명 다르다. 어제는 아직 하루를 더 살지 않았고, 하루 사이에 있었던 그 일을 겪지 않았고, 하루 사이에 있었던 그 생각들을 하지 않았다.  

그럼 수많은 그때들의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사진을 생각해보면, 사진은 항상 그때의 나로 머물러 있다. 사진 입장에서 바라보면 지금의 나는 ‘미래’인 것이다. 사진은 그 순간을 찍는 순간, 영원히 그 순간에 머문다. 

그래서 사진은 수많은 그 때의 ‘현재’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의 내가 보기에는 그 사진이 ‘추억’이지만, 사진 속의 사람과 상황은 영원히 그때의 ‘현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을 보면서 이런 대화를 많이 한다. 

“이 때 진짜 웃겼었는데.” 

“:이 사진 기억나. 사진 찍어준 사람 그 선배잖아.” 

사진은 그 때의 현재를 기록하면서 사진 프레임 밖에 있는 그 때의 현재와도 연결된다. 사진의 배경, 사진을 찍게 된 상황과 이유, 사진을 찍어준 사람, 사진에는 같이 찍히지 않았지만 사진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사람들 등등. 

영화에서 이런 것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어느 할머니의 영정 사진 찍을 때의 장면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무척 특별하게 느껴진다.  

정원의 초원사진관에 한 가족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할머니를 중심으로 큰아들, 작은아들, 딸 등으로 추정되는 자식들 그리고 손자 손녀들. 할머니는 의자에 앉아있고 자식들과 큰 손주들은 뒤쪽부터 할머니 옆쪽까지 서 있으며 그 중에 한 손주는 할머니 무릎에 앉아있다.  

“하나, 둘, 찰칵” 

가족사진을 찍고 나서 큰아들은 “어머님 사진관에 오셨으니 독사진 하나 찍으세요.”라고 말을 건네고 할머니는 다시 의자에 앉는다. 정원의 카메라를 중심으로 이쪽은 할머니 혼자 앉아있고 저쪽에는 가족들이 사소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할머니는 이쪽에서 잠시 저쪽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에 잠긴다. 할머니는 바로 아셨을 것이다. 그 사진이 자신의 영정 사진이 될 거라는 것을. 

그날 저녁 사진관에서 다림을 홀로 기다리던 정원에게 반가운 드르륵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다림인 줄 알고 얼른 내다보니 낮에 가족들과 왔었던 할머니가 홀로 들어선다. 

“낮에 찍은 사진, 그.. 그..” 

얼른 말을 못 꺼내는 할머니의 말을 알아차린 정원은 흔쾌히 사진을 다시 찍어주기로 한다. 할머니는 고맙다며 사진관에 걸려있는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얼굴을 가다듬는다.  

“나 사진 예쁘게 찍어줘야 돼. 이거 제사상에 놓을 사진이야.” 

영화 스크린 화면에 가득 찬 할머니가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정면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사진이 영정 사진으로 놓일 것이고, 해마다 제사상에 놓여질 것이라고 말이다. 

할머니는 사진 이쪽에서 저쪽을 보며 자식들과 손주들이 사소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볼 것이다. 사진 안의 ‘현재’ 속에서 말이다. 우리가 지금 입장에서 보기에는 사진은 과거이고 추억이지만, 사진 안의 모습은 항상 ‘현재’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면 사진관은 어떤 곳인가? 

그 ‘현재’들을 정지시키는 곳이고, 정지시킨 ‘현재’들을 뽑아내주는 곳이다. 사진관은 수많은 ‘현재’들이 모이고 곳이자 수많은 ‘현재’들이 나가는 곳이다. 

정원의 초원사진관 앞에 전시된 사진들의 변화에 정원의 현재를 알 수 있다. 첫사랑 지원이 찾아와 사진관 앞에 전시되어 있는 자신의 사진을 내려달라고 요청한다. 그녀의 청을 받아 정원은 사진을 내리고 그 즈음에 다림이 마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정원이 찍어준 다림의 독사진은 사진관에 전시된다. 그리고 정원이 죽은 뒤 사진관을 다시 찾아온 다림은 전시된 자신의 독사진을 보면서 정원에게 한번도 듣지 못한 고백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보고 싶다, 좋아한다, 사랑한다의 표현을 말로 하지 않았지만 정원은 사진을 통해 다림을 사랑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초원사진관은 정원 그 자체인 것만 같다. 곧 떠날 그에게 수많은 현재들을 품고 있는 정원의 마음 속, 그 마음 속을 대표하는 사진은 바로 다림의 사진인 것이다. 영화의 끝 장면에서 다림은 그것을 확인하고 웃으며 그 자리를 떠날 수 있다. 

자신은 사랑 받았음이 분명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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