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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은정 May 29. 2018

<이 시대에 청소년으로 산다는 것> 중2병

중2병, 어른들이 게으르다는 증거

 당장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초6병, 초4병이라는 단어만 검색해봐도 이 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처음 초4병이라는 단어와 함께 기사를 접했을 때 청소년을 만나는 사람으로서 미안하고 속상하고 당혹스러웠다. 중2병이라는 단어를 없애도 모자랄 판에 점점 병명이 늘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요즘 사춘기의 나이가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는 뜻일 텐데 초등학교 6학년, 4학년 때부터 사춘기에 접어들거나 사춘기 흉내를 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몸도 마음(마음이라기보다는 정보에 있어서가 맞을 듯 하다)도 조숙하다 보니 자신을 더 미화해서 표현하는 시기가 앞당겨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한 방식을 엄밀한 기준도 없이 ‘병’이라는 단어를 붙인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가 한번 가정을 해보자.
친한 친구에게
“나 요즘 마음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아. 사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
라고 말했는데
“너 그거 ‘병’이야. 병.”
이라고 대답을 듣는다면 마음이 어떨까? ‘아, 친구 말대로 병이었구나.’라고 설득이 될까? 
중2병이라는 단어의 등장 그리고 등장과 함께 사춘기를 대표하는 단어로 자리매김한 것은 이 사회가 우리 어른들이 게으르다는 증거이다. 그것도 약이나 주사, 지극한 보살핌으로 간호하는 병이 아니라 그 시기를 지나면 낫는 병으로 치부되고 있다.
중2병, 초6병, 초4병은 정확하게 시기를 지시하고 있어서 그 시기 자체가 ‘병’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 시기에 드러나는 행동과 모습은 하나에 증상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 행동과 모습은 ‘비정상적인’ 느낌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건강할 때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라 건강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모습, 한 사람의 깊은 고민과 혼란 그리고 어려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병에 걸린 것과 같아서 진짜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 병에 걸려서 그러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병에 걸려서 나타나는 증상은 병이 나으면 없어질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라서 굳이 반응하고 깊게 얘기를 들어봐 주고 의미를 가지고 다가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중2병이라는 단어는 이 사회가 그리고 우리 어른들이 이 시대의 청소년들을 얼마나 몰이해하고 깊이 만나려고 하지 않는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회적 현상’인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의 복잡하고 혼란스럽다고 하는데 그 표현을 들으면서 ‘병이구나’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이미 그 마음에 다가가지 못하는 벽이 세워진 것과 같다. 병이라는 벽 앞에서 둘의 마음은 만날 수 없이 근처를 맴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중2병이라는 단어를 세심하게 살펴보기만 하면 우리가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는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청소년 입장에서 이 단어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이 단어는 없어져야 할 단어이다. <청소년 Live 토크쇼>를 진행하고 있는데 첫 주제가 “청소년이 생각하는 중2병”이었다. 청소년들의 말을 들으면서 세 가지의 갈래로 이야기를 모아볼 수 있다.
첫 번째, 중학교 2학년에 접어들면서 ‘나도 곧 중2병에 걸리려나’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도 중2병이라고 하니까 자기도 곧 그런 모습이 될 것 같은 불안감과 걱정들이 앞선다고 한다. 변화가 오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일 텐데 그 시기에 예견되어있는 선명한 단어가 불안을 더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하고 그것이 낯설고 새로울 때 ‘이게 중2병인가?’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중2병이라는 단어로 점검한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내면에 올라오는 질문과 여러 갈래의 마음들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기도 전에 그것이 중2병의 증상인가라는 것을 먼저 떠올린다는 것은 자신과의 대화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스스로와 만날 기회를 중2병이라는 엉뚱한 판단 기준에게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 “나 요즘 이런 생각을 했어.”라고 뭔가 감성적인 말을 할 때면 친구의 반응이 “너 중2병이지?” 혹은 “쟤 중2병이야.”라고 말을 한다는 것이다. 고민이나 깊이 있는 얘기를 하면 그것이 진짜 마음이 아니라 더 미화된(혹은 허세가 가미된) 말이라고 받아들여서 공감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중2병’이라는 수식어를 매겨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속 깊은 얘기를 할 때 망설여지기도 하고 자신을 중2병으로 볼까 봐 그냥 가벼운 이야기나 쿨한 척 하면서 얘기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한번 그런 일이 있고 나면 자기도 친구에게 같은 방식으로 응수를 하다 보니 친한 친구 사이에도 얘기가 깊어지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이렇듯 ‘중2병’의 등장은 스스로와의 관계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사실 관계에서 ‘딱지’를 붙이는 것만큼 관계의 단절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어른들이 이 단어를 더 깊이 생각하고 쓰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들은 단어를 옮기고 옮겨 중학교 2학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중2병’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그 단어를 들어야 하는 당사자에게 어떤 느낌일지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이해보다는 이해하지 않는 구실이 되는 중2병이라는 단어로 청소년들은 점점 더 깊은 외로움으로 가야만 한다.
이것들은 분명 이 사회가 그리고 어른들이 청소년을 이해하는 것에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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