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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Aug 24. 2020

나쁜 며느리 되기 (시작..)

나만 참으면 되는 거였나? 선을 넘기 두려운..

늦은 밤 애들에게 잘 준비하자고 말하고 있는데 남편이

" OO 엄마!   (안부) 전화했냐?"

라고 물었다.

그래서 난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남편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잠시 있다  말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예전처럼 마음에서 우러나 안부전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숙제 하듯 안부전화를 하고 있다.

안부전화를 아들이 아닌 며느리가 당연하듯 해야 하고 안 하면 무언가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되는 상황이 몹시도 못마땅하다.


내가 변한 것은 물론 결혼생활 18년 동안 축적되어온 무언가가 있었겠지만 나를  폭발하게 하고  각성하게 된 사건은 최근 1년도 안된 몇몇의 일들 때문이다.


사십 중반의 시동생이 중매로 알게 된 지금의 동서와 결혼 얘기가 오가면서 결혼 날짜가 나올 때까지 나에게는 물론   형인 남편에게조차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형제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아니고 기가 막힌 건 내가 일주일에 서너 번씩 안부전화를 해 한 시간이 넘도록 시아버님에 대한 넋두리를 들어 드리던 시어머니조차 언급이 없었다.

크게 양보해서 그동안에 여러 중매를 통한 만남이

 결혼까지 얘기가 오간 일이 없어 신중하기로 했다 쳐도 청첩장 나올 때까지 얘기를 안 하고 있었다는 건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시댁에선 컴퓨터가 고장 났다. 가스레인지가 안 켜진다며  계속 연락을 했고 수십 번이나 말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말씀이 없었다.


진심으로 축하해 줄 일이었는데... 결혼 1 달여 앞두고 시아버님 생신에 밥 먹으며 인사한다는 얘기를

남편을 통해 들었다.


난 남편에게 그전에 시동생이나 어머니 전화를 받은 적 있느냐고 몇 번을 물었지만 없었다고 했다.  

어떻게   형한테 얘기를 안 할 수가 있느냐고 말이 없는 거랑 기본 예의가 없는 거랑은 다르다고..

어머니도 별의별 얘기를 다하시면서 어떻게 그런 얘기는 안 하는지 모르겠다고 기분 나쁘다고 했더니

남편은 내게 언성을 높이며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럼 가지 마"라  쏴 부쳤다.

그래서 난

 " 그래.. 안가. 가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아."  

라고 담담히 고백하듯 말했다.


내가 처음으로 안 본다 하니 남편도 속으로는 적잖이

놀랐던 거 같다.

생전 전화 통화한 적 없던 시동생이  여러 번 전화했다.

 난 받고 싶지 않았다.

결국엔 시아버님까지 동원해 전화를 하셔서  참석하게 되었다.

남편에게 참석하기 전 말했다.  

앞으로는 예전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남편은 알았다고 지나가듯 대답을 했다.


난 착한 며느리가 되겠다는 강박이 있었다.

어릴 적 부모님 이혼으로 우리 남매들은 할머니가 키워주셨다.

지극한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를 잘 키워주셨지만

친구들의 엄마를 보면 부러웠다.

아빠가 재혼을 하셔서 내게도 엄마가 생겼지만

그 관계는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난 결혼을 하게 되면 시어머니와 모녀처럼

지내고 싶었다.


결혼 후 난 10년 이상을 2주에 한 번씩 시댁을 내려갔고  시부모 두 분에게 이틀에 한 번은  안부전화를 했다.

내게 생기는 좋은 물건은 시댁에 드리려 했고 사업 실패로 모든 걸 잃은 시기에도 대소사를 챙겼다.

진심으로 내 부모에게 보다 더 잘해드리려 노력했고 시댁의 집사 노릇을 자청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나를 찾으셨고 심지어는

시어머니가 다단계 사기를 당했을 때에도

내가 그 사람을 찾아가 문제 해결을 했었다.

컴퓨터가 고장 나도 가스레인지가 고장 나거나

화장품을 살 때도 나를 찾았다.


한 번은 믹서기가 고장 났다고 연락이 왔는데 

휴가를 가던 차 안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휴가를 가고 있으니 돌아와 알아봐 드리면 너무 늦으니 시누이에게 연락해서 알아봐 달라 하시라 했더니 그 일로 남편에게 화를 내며 뭐라 하셨단다.

어이가 없었다.


남편은 항상 나를 앞에 내세웠다.

나에게는 며느리로서 의무만 있고 아무런 권리조차 없었다.


결혼 18년 동안 단 한 번도 명절에 "너도 친정 가야지"라는 말씀조차 없었어도  소리 없이 시누이네 먹을 거 준비했다. 저녁 먹이고 늦은 밤이나 그다음 날까지 있을 때에도 섭섭했지만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다.

 명절에 7~8시간씩 혼자 전을 부치고 음식을 하느라 디스크가 재발했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고통에도 일을 해야 했다.

너무 아파 남편에게 설거지를 하라 했더니 시어머니는 당신이 하실 테니 자기 아들 일 시키지 말라고 하셨다.

보다 못한 시누이가 자기가 하겠다고 했더니

친청 오면 딸은 편하게 쉬다 가야 한다고

손에 물 묻힌 지 말라 하셨다.


나는 싱크대에 몸을 실어 끙끙거리며  설거지를 하고

집으로 왔다.


이때부터 나는 각성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18년간의 노력이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올해 시동생이 결혼하고 동서가 생기고  명절이었다.

시댁은 차례를 지내지는 않지만 명절 음식을 엄청나게 하는데.. 그동안은 거의 내가 혼자 했었다.


동서도 늦은 결혼이라 마흔 중반 나이였다.

같이 명절 준비를 하는데 자기는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다 했다.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주도하고 그냥 보조 정도만 하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만두를 250개 빚고 다섯 소쿠리의 전과

다섯 바구니의 튀김을 하는 동안 동서는 아이처럼

 옆에  앉아만 있었다.

남편과 우리 아이 이들은 전 만드는 재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 네가 손이 빠르고 일을 잘하니 네가 해라. 작은 애는 안 해봐서 잘 모를 거다"라고 하셨다.

나는 " 어머니 누구나 처음엔 잘 못해요. 그리고 설거지는 우리 딸내미도 할 줄 알아요.

   저랑 동서랑 같이 조율하면서 할게요" 했다.


내가 다른 일을 하면서 동서에게 설거지를 부탁했더니 싱크대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왜?"

 그랬더니 동서는

" 어떻게 할지 몰라서.."

라며 말끝을 흐렸다.


시어머니는 다시

" 얘는 살림 안 해봤다니 네가 해라~" 하셨다.


결국 1박 2일 동안 혼자 음식과 설거지를 했다.

동서와 시동생은 저녁을 먹고는  집에 가서 자고 오겠다고 갔다.

하루 종일 전 부치고 튀김을 하느라 머리는 기름이 내려앉아 있고.., 몸과 마음은 파김치가 되었다.

나 자신이 싫고 짜증 났다. 무식하게 그 일을 모 조리해내는 내가 더 어이없었다.


다음 날 시누이 가족들이 오고 술상에 저녁을 먹고 정리를 하고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왔다.


새벽에 호흡곤란으로 숨이 쉬어지지가 않았다.


깊은 심해 속에서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점점 바닥으로 끌려가는 두려움과  

들숨과 날숨이 엉켜 호흡이 힘들어지는...


모두가 잠이 든 새벽 무섭고도 서글픈 시간이었다.


이때까지도 난 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었던 거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으려 애쓰던 가엽고 어리석은 나를 이제야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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