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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Sep 04. 2020

나쁜 며느리되기 2

(나는 누구를 위하여 애쓰고 사는건가?)

댁의 대소사를 챙기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명절뿐 아니라 시댁 사촌에 팔촌의 결혼식과 행사에  우리 가족의 동행을 원하셨다.

어렵고 불편한 자리는 물론이고 지방까지 내려가는 일이며 재정적인 지출도 무시 못 할 일이었다.

친인척들과 지인에게  아들 내외 잘살고 있고 당신께서 다복하다는 걸 보이고 싶으시구나 하고 어머니께서

기분 좋으시면 그 걸로 됐다 싶었다.


그러나 맞벌이를 하며 두 아이 독박 양육에 매일이 파김치가 되어 다람쥐 채바퀴처럼 살아가는 나에게  한 달이 멀다 하고 동원령이 요구되니 너무 힘들었다.

남편 삼 남매 중  우리에게만 참석을 했다. 다른 형제들은 매번 일이 생겼다는 이유로 불참을 했지만

우리 가족만은 예외였다.


남편은 효자노릇을 자처했고 늘 나를 앞세웠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남편에게 서운함을 토로해 보지만 나에게 소설을 쓴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난 어느 날 갑자기 각성을 하게 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소리 없이 긴 시간 동안  내상들을 덮어두고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나의 결혼생활 전체를 뒤 흔들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곪아 가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호흡곤란 증세가  잦아지고 불면증으로  밤을 새우고

출근을 해야 하는 날이 많아졌다.

피곤하고 무기력한 날의 연속이 되어 멘털이 무너질 것 같았다.

난 신경정신과를 찾아갔다.

몇 번이고 꼭 가야 할까 망설이다 용기를 냈다.


나는 중증의 우울증 증세과 공황발작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모두에게 잘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그보다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지 고민해 보라고 했다.

아주 작지만 하면 행복한 나를 위한 일을 찾아보라고..

소소하고 무의미하지만 나만의 위한 그런 시간을 갖도록 해보라고 했다.


결단의 시간



시간은 흐르고 또 다른 명절이 오고야 말았다.

명절을 앞두고 고모부(시누이의 남편) 생일이 있어 시댁 식구들과 저녁을 하는 자리였다.

시누이가  (고모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시댁 갈 일이 없으니 올 명절부터는  일찍 점심 먹고 올케언니들은

친정 가는 게 어떠냐고 얘기를 꺼냈다.

시어머니는  무슨 소리냐고 하면서 시누이에게 전날 와서 자고 담날도 저녁까지 놀자 하셨지만

난 대꾸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난 남편에게

"고모 말대로  이번 명절부턴 명절 당일 점심까지만 같이하고 오자"

남편은 하루 이틀만 참으면 되는데 일찍 가니 어쩌니 해서 왜 분란을 만들려고 하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명절 때마다 두통약을 달고 살면서 그리도 자기 집이 싫으냐고 자기 어머니는 좋은 분인데

내가 오버하고 자격지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달랐다.


"결혼한 지 18년이야. 무슨 때를 얼마나 기다려야 해? 어머닌 한 번도 먼저 가라 하신 적 없어!

당신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되잖아.

어머니께서 안된다면 못 가는 거냐고? 나도 친정이 있는데  한 번도 명절에 친정 가라고 하지 않고

어머닌 고모 언제 오냐고  빨리오라고 전날부터 전화하시는 게 난 이해가 안가.

당신도 이해 안 가고..

내가 명절에 친정 가겠다는 게 이혼할 일이야?

그리고 아침부터 7~8시간을 혼자 전 부치고

튀김 하는 게 말이 돼?

요즘 시대에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그렇게 음식을 많이 해? 그렇다고 그걸 다 먹는 것도 아니고..

이웃들 다 나눠 주고도 냉동실 들어가는 게 반이상이야..

많이 발전해서 전 부치는 거 당신이 돕게 됐지만 그나마도 어머닌 당신은 들어가 쉬라고 하고

고모네 식구 오면 술상에 간식상에 끝없이 들이라고 하고..

두통약이 없으면 있을 수가 없어.

 매번 명절 이후엔 디스크 재발하고..

명절이 다가오면 온몸이 아프고 두통이 시작된다고"

라고  말했다.



남편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자기 엄마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며 그런 맘을 갖고 있는 나랑은 못 산다며

흥분했다.

남편이 흥분할수록 나는 분명하고 또렷해졌다.

그 사람은 내가 왜 변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하기보단 시댁에 어떻게 보일까 명절에 며느리 노릇 못할까를

걱정하고 있었다.

결혼 생활하는 동안 나는 남편에게 맞춰주고

시댁에 맞춰 살고 아이들에 맞춰 살았다.

시어머니를 비롯 시댁의 모든 사람들은  나의 노동은 며느리로서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을 하도록

만든 건 나의 책임이었다.


아프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렇지만 내 몸과 마음이 아프게 되니 알게 된 사실이고 내가 아프다고 하면 모두가

한마음으로 걱정과 배려를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결혼 후 나의 자존감은 바닥이 되었다.


착한 며느리, 좋은 아내이자 엄마가 되려고 애쓰면

 남편도 자상한 아빠 다정한 남편이 되려고

 노력할 거라 생각했다.


나의 희생과 노력이 배려로 돌아오길 바랬지만  권리로 바뀌어 나에게 의무를 강요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효도를 나를 통해 하려 했고 어머니에겐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와  당신 가족의 울타리만

 중요한 것 같았다.


이혼을 하자는 남편 말에 더 이상의 얘기는 시간낭비 같았다.

꾸역꾸역 그놈의 명절이 뭐길래 18년 결혼생활을 끝내겠다는 엄포를 놓는 건지 그 따위 협박이 오히려

내가 어떤 결정을 할지 명확하게 해 주었다.



토 달지 말고 가던지 아님 끝이라고 했다.

남편은 내가 아프고 힘들더라고

이평화가 깨지지 않기를 원했다.

금까지 그래 왔듯 하루 이틀만 내가 참기를 바랐다.

그런식으로 나는 18년을 참았다.  

남편은 그렇게 말하면 이제껏 그래 왔듯 내가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설 줄 알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수많은 불면의 밤과 때때로 찾아오는 호흡곤란으로 인한 공포를 겪으며 결심했다.

무엇 때문에 이리도 힘들게 사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면서 답을 찾고 싶었다.


명절에 시댁에 가질 않았다.


결혼하고 처음 혼자가 되어  집에 남았다.


마음은 거부하고 있지만 몸은 노동을 기억하고 죄책감에 겁이 났다. 누가 그 많은 음식을 할지..

내가 없어 시댁  명절이 엉망이 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남편이 어떻게 사태를 수습한지는 잘 모르지만..

시어머니는 내게 전화하지 않으셨다.

내 이야기를 들어보려 하지 않으셨다.

시댁 누구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없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쉽게 내가 잊힐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용기를 내볼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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