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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Nov 16. 2019

나의 혜디-타

일희와 일비에서 굳이 고르자면 우린 희희

무소속이 된 지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음을 돌보던 계절도 있었고, 들어오는 일을 무엇이든 하며 잔고를 채우는 계절도 있었다. 감정의 부유물들 위로 걸러진, 일하는 생의 질문들을 고민하는 계절도 있었다. 이 모든 계절 동안 감사하게도 무원씨 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이야기를 많이 나눈 동료가 있다.  


배달의민족 을지로체와 찰떡같은 혜디-타. 오타였다고 주장하는데 그에게 이런 고오급 위트가 있는 줄 전엔 몰랐네.


회사 동료일 때도 우린 슬랙으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때는 주로 ‘좋은 콘텐츠란 무엇인지’, ‘잘 읽히는 콘텐츠, 사랑받는 콘텐츠는 무엇인지’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에게 혜디-타는 우리가 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료였다. 나는 일에 있어서 ‘방법이 없다’, ‘안된다’라는 말을 믿지 못하는 병이 있는데 그의 말은 믿었다. 그가 ‘안된다’ 면 정말 방법이 없는 일이었다.  


사실 우린 서로 너무 달라서 일 외에는 잘 맞는 구석이 별로 없었다. 나보다 무원씨와 더 잘 맞았는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무원씨의 취향은 틀림없이 그의 취향이기도 했다. 게다가 늘 욕망에 불타는 나에 비해 그는 대부분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그래도 아주 가끔 ‘일하는 삶의 기쁨과 슬픔’이라든지 ‘귀여운 할머니로 늙어 죽고 싶은 꿈’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퇴사한 뒤 우린 더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서로의 안위를 묻다가도 늘 ‘좋은 콘텐츠’ ‘행복하게 일하는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야기가 흘렀고, 몇 시간씩 카톡을 했다. (퇴사하자마자 거금을 들여 맥북, 그것도 프로를 샀는데 첫 한 달은 거의 그와 카톡 하는 데에 사용했다.) 일과 삶을 분리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우리는 결국 지난 8월 우리에게 제일 익숙한 슬랙을 하나 팠다. 이름은 도토리 창고. 퍼블리에서 함께 일하던 시절 ‘읽을거리’ 채널에 온갖 도토리를 모아 나르던 버릇을 버리지 못해서였다. 회사의 일과 관련된 읽을거리를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던 시절을 지나, 우리의 일, 일생의 일에 대한 읽을거리를 함께 읽고 고민을 나눈다. 속한 팀에서 좋은 구성원, 좋은 매니저가 되기 위한 고민을 넘어 평생 할 일과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삶에 대한 고민을 나눈다.


그렇게 우린 회사 동료에서 그냥 동료가 되었다.
우리 꼭 눈빛이 젊고 형형한, 건강하고 귀여운 할머니가 됩시다. photographed by @thsgus


그마저 퇴사한 뒤 우린 자주 만나고 자주 작당했다. 주로 뭐 먹고살지,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뭐하고 놀까 하는 수준의 작당이지만 가끔 직업병의 잣대로 들여다보면 기록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 같기도 했다. 김태호 피디와 유재석의 그것처럼 놀면 뭐하니 싶어 일단 기록해보기로 했다. 우리의 고민의 시간들을,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향한 우당탕탕, 작은 실행들을. 기쁨과 슬픔으로 넘칠 우당탕탕 중에 우린 굳이 고르자면 일희도 일비도 아닌 희희.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기쁘고, 조금이라도 행복하고, 또 조금이라도 희망을 남기고 싶어서 '일말의 희희'를 기록하기로 했다.


일에서의 기쁨과 슬픔은 주로 욕망 때문에 발생하는데, 나는 사실 아직도 나의 욕망을 잘 모른다. 동산에 오르고 싶은지, 북악산에 오르고 싶은지,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싶은지 결정하지 못했다. 동산에 오를 것인데 굳이 자동 온도조절장치가 있는 풀방수 고어텍스 외투 같은 게 필요하지는 않을 텐데 나는 여전히 '혹시 모르잖아' 하는 마음으로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이런 내게 혜디-타는 늘, 오를 산에 따라 필요한 장비와 적합한 몸 상태가 있을 것이라며 "어떤 산에 오르고 싶은지 잘 알아야 해요"라고 말하면서도 나와 비싼 고어텍스 외투를 보러 가주기도 하고, 뒷산 산책용 운동화를 보러 가주기도 한다.


'일말의 희희'를 쓰기로 결정하고,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 요조와 임경선의 교환일기>를 두 권 샀다. 정확히는 "정말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서로의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봐야만 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뜻이다"라는 문장을 읽고, 바로 한 권을 더 샀다. 혜디-타와 회사 동료에서 그냥 동료가 된 후로 욕망보다 나의 진짜 '욕구', 나의 진짜 '두려움', 나의 진짜 슬픔 같은, 진짜들에 대해 더 많이 나누어서 정말 좋다. 이런 이야기와 시간들이 쌓이면 우린 서로의 진짜 생을 더 응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결국 우리가 욕망하는 평생 '근사하고, 즐겁게, 지속 가능하면서도,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함께 본 콘텐츠 #1. <chosen1> 유튜브 시리즈

박재범과 AOMG에 대한 다큐멘터리. 17분짜리 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재범이 왜 AOMG를 시작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AOMG를 이끌고 있는지 굉장히 진솔한 목소리와 훌륭한 영상으로 보여준다. 크루의 본질과 특성, 느슨한 동료 관계의 잠재력, 그리고 크루로 일할 때의 리더십과 원칙 등에 대해 고민할 때 가장 강력한 영감을 준다.

영상을 잘 안 보는 혜디-타가 강력하게 추천해서, 이걸 보기 위해 처음 유튜브 프리미엄 가입도 했다. 우리가 꼽은 2019년 최고의 콘텐츠.

1화 뉴 브리드 | Jay Park: Chosen1, 2019

GQ 박재범 인터뷰 "섹시한 건 자신감의 문제죠",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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