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때부터 막내딸인 저는 엄마, 아빠의 흰머리 뽑기가 소소한 용돈벌이였습니다. 엄마 꺼는 한 가닥에 500원, 아빠 꺼는 10원이었던가... 그 애가 이제는 훌쩍 커서 거울 속 자신의 머리카락을 들추며 속절없이 자라나는 흰머리를 보고 고민을 하고 있어요.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우뚝 솟은 흰머리가 보기 싫어 맘 같아서는 다 뽑아버릴까 싶다가도 머리숱도 걱정을 해야 할 나이가 다가오니 가위로 잘라야 하나? 아니면 염색을 할까? 친정 언니 말로는 새치 마스카라라는 것이 있다는데 한번 검색해 볼까..
사실 흰머리가 날 나이가 돼서 나기 시작한 것일 텐데요, 요즘 저는 자꾸 이런저런 탓을 하게 되네요.
아이에게는 네가 엄마 말 안 듣고 공부 안 해서라고,
남편에게는 당신에게 내가 시집와서 고생을 하니까라고,
여기 일본 방사능 때문은 아니냐며 쓰나미 탓까지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오늘도 거울을 보며 이러다 나 백발마녀 되는 거 아니냐고 속상해하는 저에게 아들이 이렇게 말해 주더라고요.
"엄마! 엄마는 백발마녀가 아니라, 백발 미녀예요."
세상 스위트 한 우리 10살 난 아들, 밤하늘에 뜬 달을 보고 엄마는 달이고 본인은 달토끼라며 저를 늘 웃게 해 주는 녀석의 말을 백발 미녀라는 말을 듣고 나니 누구 탓을 하는 제 맘이 사르르 녹습니다.
거울 속 흰머리를 보고 있으면 실은 지금 제 스스로가 이고 지고 있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보입니다. 내 삶의 안전지대였던 직장의 결계를 끊어낸 퇴사 후의 삶이 저에게는 흰머리카락입니다. 생전 안 해보던 글을 쓰고, 일하는 여성들을 코칭하고, 제 삶의 히스토리로 타인을 응원하는 강연자가 되고 싶다는 새로운 꿈길로 가는 것이 힘에 부칩니다. 초행길은 구글 지도를 보고 길을 찾는 것도 지치는데, 지도에 없는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더 어렵네요. 뭘 해도 성에 차지 않고, 또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스스로에게 충분히 만족스럽지도 못합니다.
TV를 보다 보면 종종 무슨 요리사 15년 경력, 연기자 10년 차 베테랑 이런 식의 인물 소개 수식어들이 나오던데요, 과거의 나는 직장 생활 18년 차였는데... 도대체 뭐 했던 거지? 분명 매일 최선을 다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출근을 했던 것만 기억이 나네요.
퇴사 후 펼쳐진 제2번째 커리어에 있어서는 5년 차, 10년 차, 15년 차에 내가 다지고 닦은 길에 서있고 싶습니다. 누구보다 고과가 좋고, 누구보다 빨리 승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고 그 길에서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과 작은 뿌듯함을 느끼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한 글자 더 적어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비록 퇴사 후 2년 차 당장 성에 차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채워나가면 진짜 백발 미녀가 될 때 그 백발을 나와 타인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 온 증표로 대견해하고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번에 오스카상과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한 윤여정 배우님의 멋진 은발처럼 말이지요.